소년은 어려서부터 또래들에 비해 몸집이 컸고 힘도 셌다. 강원도 산골을 뛰어다니는 모습은 군계일학마냥 우뚝했다. 조숙한 편이라 혼자 동산에 올라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열다섯 살 되던 해 늦은 봄, 고아나 다름없이 외로웠던 소년은 출가를 결심했다. 계사는 건봉사의 계허, 은사는 의산이었고, 설산(雪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소년은 이제 스님이 되었다.
기왕 불문(佛門)에 든 몸, 깨달음을 얻고야 말겠다고 설산은 치열히 수행했다. 한편 건봉사가 운영한 봉명학교에서의 공부도 썩 맘에 들어 했다. 봉서소년회에서 열리는 독서토론회, 가장행렬에는 누구보다 열성이었다. ‘선창’의 작사가 조영암(趙靈巖), 시인 최재형(崔載亨)은 당시의 동문이었다. 이런 근대적 문화체험은 청년 설산에게 문학적 열정을 불어넣어주었다. 이후 〈지옥을 불태워버려라〉, 〈뚜껑없는 조선역사〉, 〈구름에 달가듯이〉 등을 지은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즈음 만해 한용운을 만났다. 사미승으로 조실방에 심부름 온 그를 보고 만해는 대뜸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감히 고개를 들지는 못했어도 목소리만은 또릿하게 의병 박영발의 손자이자 의병대장 박준성의 사촌아우노라고 고했다. 만해는 설산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배석한 금암 사제에게, “대들보가 안 되면 곧은 서까래라도 만들라”고 당부했다. 만해는 이후로 인생과 수행의 사표가 되었다. 일제에 의해 징병되었으나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전장으로 끌려갈 수는 없다고 스스로 발가락을 끊고 의병제대한 것도 만해에게 물려받은 기상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설산을 만해는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다(〈뚜껑없는 조선역사〉). 건봉사 주지를 지낸 설산의 기억에는 만해스님의 대죽같이 꼿꼿하던 모습, 협잡한 주지를 몰아내던 금암스님의 일화 등 건봉사와 근대불교의 역사가 그득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정토학회 고문, 실달학원 원장 등을 지내며 90평생을 전법에 바친 설산스님이 지난 6일 입적했다. 질곡 속을 힘들게 걸어온 스님이 이젠 그 법명 마냥 설산에서 한 걸음 쉬고 있을까.
신대현/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불교신문 2311호/ 3월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