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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이해인

이원식 시인 2009. 4. 25. 00:02

 

 꽃삽(1994).  이해인 글모음.

 

 ▶이해인 수녀.

 

이 시대의 불의와 어둠을 탓하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성급하고 충동적인 저항의 큰 몸짓을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제대로 가꾸고 돌아보는 지혜를 키워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겐 '잘 죽어 잘 익은' 성숙함을 기대하면서도 자신의 설익음은 개의치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맛있는 김치가 되기 위해 숨죽여 엎드려 있는 배추들의 기다림과 침묵의 수련기를 지켜보면서 나도

소금에 잘 절여진 배추처럼 매일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는 조용한 죽음

의 용기를 배우면서.

 

<배추를 씻으며>에서.(p.51)

 

 ▶수녀원 정원.(p.16)

 

우리도 늘상 고독의 첫 자리에 두고,

고독을 위해 비워 놓은 의자에 그를 자주 초대해서

깊이 사귀고 길들일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지며

한걸음 더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고독을 위한 의자>에서

 

 ▶파밭에서 일하는 수녀들.(p.57)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詩)지만 밭은 흙의 시(詩)이다.

비온 뒤 밭에 나가면 발이 폭폭 빠지도록 젖어 있는 흙냄새가

눈물나도록 정다웠다.

흙은 늘 편안하고, 따스했다.

흙을 만지면 더없이 맑고 단순한 어린이의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밭 가까이 살며>에서

 

 ▶수녀원 다락방의 촛불.(p.98)

 

내 방의 벽 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 달력을 걸듯이

내 마음의 벽 위에도 '기쁨'이란 달력을 걸어놓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새 달력을 걸고>에서

 

 ▶수녀원 장독대.(p.256)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현재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보고 싶어도 너무 멀리 있거나 소식을 모르는

과거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어떻게 불신과 미움의 포로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봄마다 새로운 꽃씨를 뿌리듯>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