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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정토, 단청丹靑/ 원담스님

이원식 시인 2009. 12. 5. 23:59

*이 글은 시인이며, 경남 의령 유학사 주지이신 원담스님께서 《해인海印》2009. 9월호에 발표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유학사 카페: http://cafe.daum.net/youh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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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정토, 단청丹靑/ 원담

 

 

금빛 바람결
무지개 걸려있는 거기
하늘을 나는 물고기
구름속으로 수영을 한다.
불벽佛碧 사이로 숨은 꽃들은
백일홍 가지 끝으로 손 내밀고
어느 화공이 두고 간 하얀 소 한 마리
풀밭을 거니는 거기
사르르 피어나는 오색 빛 연꽃
몇 생을 걸어와
벼르고 벼른 그리움의 손길
아침마다 합장하며 염원하던 거기
시방의 중생들 나비처럼 날아서
금빛 바람으로 돌아와 앉은 정토에
백일홍 꽃비가 내린다.
- 졸시 <단청丹靑>

이번 여름 내내 법당 단청 불사를 했다. 곱게 옷을 입은 법당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고 이곳을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들에게까지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법
당 앞에 고목으로 서 있는 배롱나무조차 한 폭의 그림 같다. 그 나무가 피워 올린 백일홍꽃은 볼수록 아름답다.
백일 동안 피고 진다고 해서‘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하고, 간지러움을 잘 탄다고 해서 배롱나무라고도 하는데,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배롱나무 가지 사이로 단청빛이 꽃송이처럼 화사하다. 단청빛깔이 햇살 드리우는 쪽마다 시시가각 변하는 모습도 새삼 느끼는 흐뭇함이다.
법당을 증개축한 지 7년 만에 단청을 하려니 무엇부터 준비를 해야 하는지 답답할뿐더러 갑자기 큰 숙제를 눈앞에 둔 막막한 상황이어서 일단 다른 절에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관에서 입찰공사를 하지만 업자가 단청장(기능기술자)과 방문해서 어느 선에서 어느 선까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평소‘단청이 참 좋다’‘좀 화려하군’‘너무 색상이 진하다, 약하다’‘독특하다’뭐 이런 시각으로만 봤었고 굳이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지의 극치다)
막상 내가‘단청’이라는 불사 앞에 당면해서야 불사 경험이 있으신 스님들께 여쭤보고, 여기저기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직접 현장에 가서 보기도 했지만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과 인터넷을 찾아 우선 급한 대로 공부를 하다 보니 옛 어른스님들께서 불사를 어떻게 하셨는지 조금은 마음 깊이 새로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어느 정도 행정적인 부분을 마치자 곧바로 화공들이 와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단청하는 일을 지켜보게 됐다. 또한 절에서 3개월 동안 숙식을 하는 화공들의 구름 같은 여정과 나름대로‘화공(단청장)’의 길을 가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
불명佛名이‘서인西印’이라고 하는 서인 거사는 3개의(단청,옻칠,수은도금) 기능자격증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수은도금 쪽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우리 스님께서요. 스님들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예~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찬찬히 설명을 해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설사 옳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신심信心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고요.’이렇게 말하면서도‘우리스님’(은사스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던 서인 거사는 유발상좌有髮上佐로서 열반에 드신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이 남달랐다.
그는 부처님 일을 30년 넘도록 하면서 그저 재물보다는 신심으로 한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청일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 문득, 절에 살면서도‘중’이 못 되고, 마을에 처자식이 있으면서도 온전히 마을사람도 아닌, 이들은 평범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만은 확실해보였다. 지금 사회에서는‘자격증’시대이다보니 부처님 일을 하면서도 실력보다는 자격증을 더 선호하는 오늘날 불교미술의 현실에 이들도 이따금 번민스럽다고, 일이 없을 때는 마냥 기다리고, 일이 많을때는 며칠도 쉴 수 없는 상황에, 마치 5분 대기조처럼 기다린다고 한다. 이곳(화공들의 세계)에도 나름의 법칙과 차례가 있어 선후배 질서라는 게 엄격한 모양이다. 제일 어른인 수장이 밤늦게 필요한 것이 있어 심부름을 보내면 당연히 막내가 가야 했다고, 예전엔 자동차가 없고 절은 깊은 산중에 있으니 걸어서 몇 십리를 다녀오면 새벽이 됐다고 한다.
“이다음 아들 녀석이 대학을 졸업하면 출가出家해서 큰스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예 초등학교 때 보내려했는데 집사람이 안 된다 해서...”라며 너털웃음을 웃는 그를 보니 그런 그들이 있어 우리의 불교미술이 좀더 꽃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금단청이라고 해서 금金을 많이 사용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책을 보고 서인 거사의 설명을 들으니 금단청錦丹靑이란다. 금단청은 최고등급의 장엄양식이라고 한다. 잠깐 설명을 곁들이자면 비단금錦자를 붙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비단에 수를 놓듯이 모든 부재를 복잡한 모양과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금단청 양식에는 금문金紋이 추가로 장식되는데 이 때문에‘금단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3개월 동안 쏟은 그분(화공)들의 신심과 수고로 아름답게 태어난 금단청 법당을 천천히 다시 한번 살펴보니 다양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속 동물은 용, 봉황, 학, 박쥐, 물고기 등등이 보인다. 자연을 표현한 것은 해, 달, 별, 구름, 기암 등이었고, 꽃은 연꽃, 국화, 모란, 난, 석류, 매화, 수국이 살아 있는 듯하다. 그 외 소
나무, 대나무, 비천상, 선인, 나한, 귀면, 동자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림들이 생명을 불어넣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몰라서 보이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사찰을 찾는 신도는 물론 일반 참배객에게도 사찰연혁을 이야기할 때 곁들여서 숨은그림찾기(단청의 이해를 돕고자)를 해도 즐거울 것 같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팔상도, 심우도뿐만 아니라 단청을 하는 의미서부터 나무모양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들을 설명해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찰로 남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건물을 짓기 위해 목재를 고르고 도편수의 손길을 거쳐 건물이 지어지고, 미장의 손을 거쳐 흙벽을, 다시 와공의 능숙한 솜씨로 기와가 올라가고, 그 후 2,3년에서 길게는 5년 정도(경제적 형편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음)시간이 흐른 다음 고운 채색으로 옷을 입으면 완성된 건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유정물有情物이든 무정물無情物이든 하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순간부터 끝없이 옷을 갈아입는 연습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단청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추함은 가려지고 조금의 틈새에도 벌레가 깃들지 아니하고 , 생각지도 않고 불쑥 내뱉는 언어에도, 점점 나태해져가는 마음까지도 고운 색을 입혀보면 좋겠다. 산빛처럼 물빛처럼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색감들이 이렇게 사람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에 미치니 내게도 단청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무지개빛 속에는 고운 듯 하면서도 화사함이 묻어나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보는 이의 마음에 산뜻함을 주는 채색들이 이렇게 기분 좋아지는 줄 전에 몰랐었다. 저리도 고운 색色 이며 아름다운 선線이 비바람에 서서히 옅어지겠지. 그리고 먼 훗날 그곳이 수많은 나그네들의 정토가 되리라.


 

   《해인海印》2009.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