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시조자료·시조집

5.단수와 연작, 격조(格調) 또는 경(境)- 정완영

이원식 시인 2007. 11. 4. 23:05
[ 단수와 연작 / 정완영 ]


이웃에 봄을 나눈
살구꽃 그늘 아래

도란도란 얘기들은
소꿉질에 잠차졌고

상치 씨
찾는 병아리
돌아올 줄 잊었다.

작고한 시인 이영도 선생의 <봄Ⅱ>이다. 시조는 원래 시절가조(時節歌調)라 하여 계절이건 인심이건 시절을 노래한 시였다. 그리고 시제라는 것을 붙여서 노래했던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연작이니 하여 여러 수를 엮어서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던 것도 아니다. 하기 때문에 시조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이 단수에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 일본의 단가니 배구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시조의 본을 떠서 시제를 붙이는 일도 없고, 노래 속에 반드시 계절이 나오며, 더더구나 연작이라는 것은 없다.

여긴 내 신앙의 등주리 낙동강 흥건한 유역
노을 타는 갈밭을 철새 떼 하얗게 날고
이 수천(水天) 헹구는 가슴엔 [세례요한]을 듣는다.

석간을 펼쳐 들면 손주놈 [고바우]를 묻는다
혀 끝에 진득이는 이 풍자 감칠맛을
전할길 없는 내 어휘 모국어로 가난타네.

네 살짜리 손주놈은 생선 뼈를 창살이란다
장지엔 여릿한 햇살, 접시엔 앙상한 창살
내 눈은 남해 검붉은 녹물 먼 미나마따에 겹친다.

역시 이영도 선생의 <흐름 속에서>라는 작품이다. 이런 시상을 단수에는 담을 수 없다. 현대인들의 복잡하고 다기한 생활상을 3장 6귀에 다 담을 수 없어 자연발생적으로 이어져 나간 것이 오늘날의 연작시조라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 두어야 할 일은 아무리 연작이라 하더라도 수마다 떼어놓고 보아 한 수 한 수가 다 작품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둘 일은 3장 중 어느 한 장은 꼭 풀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 격조(格調) 또는 경(境) ]


아무리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품이 높지 않으면 우선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낙제다. 시조가 아무리 좋은(?) 뜻을 담았다 하더라도 격조가 높지 않으면 낙제다.


난(蘭)있는 방이든가, 마음귀도 밝아온다
얼마를 닦았기에 눈빛마저 심심한고
흰 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뵈인다.

김상옥 선생의 작품 <난있는 방>이다. 밝고 맑고 청정하기까지한 시다. 3장 단수에 갈무려져 있는 간결한 시상을 마치 한 장 백지장을 떠올리듯 건져내고 있다. "흰장지 구만리 바깥 손 내밀 듯" 내뵈는, 정말 눈빛까지 심심한 작품이다. 이 무욕, 이 허심, 시가 여기에 이르르면 하나의 선(禪)의 경지에 들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의 품격, 다시 말해서 시조의 격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작품이다.
다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경(境)]의 이야기다. 자유시와 시조의 상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유시에 있어서 [의(意)]가 시조에 있어서는 [지(志)]요, 자유시에 있어서 [논(論)]이, 시조에 있어서는 [관(觀)]이라는 이야기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시에 있어서, [유(流)]는 시조에 있어서는 [풍(風)]이라고나 할까. 이 좁은 지면의 논고에서 일일이 작품까지를 들어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자유시가 시조에서 배워갈 것이 있을 지언정 시조가 오늘의 자유시 쪽을 아무것 하나 의식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탄주할 때나 시조창(時調唱)을 할 때도 그 [경(境)]이라는 것이 있다. 가사 <동산일출(東山日出)>이라든지, <평사낙애(平沙落雁)>이라든지, <주마축지(走馬蹴地)>라든지, <경조탁사(驚鳥 蛇)>라든지 우리 시조의 종장에도 이런 [경(境)]이라는 것이 있고 또 한 수 한 수에는 수마다 시정신의 뿌리가 그 경(境)이라는 것에 가 닿아야 하는 것이다.
즉 희(喜)이거나, 비(悲)거나, 애(哀)거나, 낙(樂)이거나, 환(歡), 적(寂), 고(孤), 멸(滅), 근(近), 원(遠), 직(直), 우(迂), 묘(妙), 현(玄), 등 무어 동양정신의 뿌리가 어느 경(境)에 가 닿긴 닿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무튼 시조란 자수만 맞으면 되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