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시조자료·시조집

2.생활과 운(韻)- 정완영

이원식 시인 2007. 11. 4. 23:04
[생활과 운(韻) / 정완영]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4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절차이다. 그 4가지 절차 중에서 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는 지금도 형식상 살아았지만 관례(冠禮)만은 이미 희미한 기억 속에 매몰되어가고 없다. 하지만 예(禮)라는 것이 사라지기야 이미 오래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제례이야기다.
<제삿날 큰집에 모여드는 등불 이야기>이다. 연전 어느 사회단체에서 예술인의 성장과정을 조사한 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제삿날 종가(宗家)집에서 지내는 제례는 감수성이 강한 어린 소년 소녀의 가슴 속에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는 조그만 감동을 심어주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어린 시절 할아버님 아버님의 손길에 이끌려 마치 석류꽃 같은 초롱불을 밝혀들고 큰댁으로 참배차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속에 조그만 희열의 잔물결이 파문짓곤 하는 것이다. 1년이면 열번도 넘어드는 대소 제례는 철따라 꽃 피고 잎 지는 시절의 사이사이 우리들 한국에 생을 받은 소년들의 향수에 사무치는 축제요. 카니발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생활,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골을 밝혀주던 하나의 심등(心燈)이요, 하나의 운사(韻事:운치 있는 일)인 것이다. 시조 이야기를 하면서 제례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그 제례의 운치가 바로 시조의 운치와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바로 제례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운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생활주변에서의 그 운사들은 등불마저 희미하게 빛바래져가고 말았다. 제례뿐만 아니라 운사란 운사는 하루가 다르게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행사는 있어도 운사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 우리 주변에서 운치를 되찾고 그것을 느끼는 일, 그것이 우리 고유의 정서를 되찾는 것이며 시조 캠페인의 기본이요 근간이 되어야한다.
아직 안동(安東) 차전(車戰)놀이도 있고, 봉산탈춤도 있고, 하회탈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행사 날에나 선보이는, 그야말로 하나의 행사이지, 서민대중 속에 뿌리박은 민족 애환의 운사는 못되는 것이다.
차라리 대보름날 부럼을 깨물고 달불을 놓던 일, 3월 삼짇날 금줄을 치고 황토를 깔던 일, 5월 단오절 그네를 뛰고 궁궁이물에 머리를 감던 일, 6월 유두날 동류를 찾아 머리를 헹구던 일, 7월 백중날 물꼬를 찾아가서 겨릅에 꽂아둔 인절미를 뽑아먹던 일…같은 것들이 우리 정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며 그 운치가 시조의 훌륭한 소재가 되는 것이다.
생활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면 문화는 사멸하고, 정치는 경직하고, 역사는 정체되는 법이다. 진실로 작은 듯하면서도 아주 막중한 일이 생활 속에 운을 불어 넣는 일이다. 시조를 국민문학·민족문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것이 선행돼야 한다.
필자는 가끔 이런 일을 생각해 보며 아리송해질 때가 있다. 가령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란 현실과, 우리 선인들이 살고 간 그 시대의 사화상과를 비교해 볼 때, 과연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오늘이란 세월이 반드시 더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지(人智)나 문명이 좀 덜 깨인 채라도 훈훈한 인정과 정감에 젖으며 살고 간 옛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복을 누리고 갔다 할 것인지?
사람에 따라 그 척도하는 바가 다르기야 하겠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물질문명이 갖다준 편리라는 이기를 얻기 위해서 인간 본연의 재화인 덕성마저도 팔아넘기는 오늘보다는 차라리 자연과 인성의 본향에서 조금은 배고프고 조금은 등이 시려도 서로들 애휼(愛恤)하며 살아가던 그날이 훨씬 더 소망스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시조만이 가지고 있는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조짓기운동은 식어가는 민족정서에 군불을 지피고 굳어가는 인간덕성에 모닥불을 놓아 사람마다의 가슴에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더운 숨결을 회복하고 집집마다 마을마다 인정있는 꽃밭을 가꾸자는데 큰 뜻이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