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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아가 발화하는 심연의 확대-조오현론 / 유성호

이원식 시인 2007. 11. 4. 23:13
타아(他我)가 발화하는 심연의 언어
-조오현론

유성호(문학평론가, 한국교원대 교수)


1.

대개의 시조 작품은, 정형적 율격과 전통적 시상의 결합에 의해 씌어짐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적 경험을 하나의 원형(archetype)에 가까운 형식으로 보여준다. 시조가 발생한 이후 역사적 성층(成層)이 두터워지는 과정에서, 이 같은 양식적 속성은 점증적으로 강화되어왔다. 말하자면 시조는,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경험의 해체보다는 그것을 재확인하고 형식화하는 데 무게중심을 할애해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실험적 양식의 시조들이 해체와 아이러니를 미적 목표로 하면서 왕성하게 창작되고는 있지만, 정형적 율격이라는 양식적 구속을 시조 고유의 장점으로 견지하려는 시인들의 노력은 ‘왜 하필이면 시조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해 충실함으로써, 시조가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씌어지고 소통되는 양식임을 증명해왔다고 할 것이다. 특별히 우리 시대의 현대시조는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전언과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안에서 생의 근원적인 형식을 경험케 하는 특성을 지녀왔다. 이 점에서 우리가 정형 양식으로서의 속성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이채로운 형이상학적 경험과 근원적 감각을 담아낸 시인들의 작업을 눈여겨볼 필요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가 이 글을 통해 살피려고 하는 조오현(曺五鉉) 시인의 작품들은, 이 점에서 우리 현대시조의 뚜렷한 한 수범 사례(垂範事例)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잘 알듯이, 조오현 시인은 불가에 몸을 담은 지 매우 오래된 선승이다. 조오현 스님의 불명은 무산(霧山), 법호는 만악(萬嶽), 자호는 설악(雪嶽)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적 전언에는 불가적인 어법과 어휘 그리고 세계관이 불가피하게 두루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불가적 사유 자체가 언어적 표상을 넘어서고 부정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느니만큼, 조오현 시인의 세계 역시 불가적 전언의 시적 번안(飜案)으로만 취급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가 조오현 시편들을 굳이 선승의 언어로 접근하지 않고, 시인의 언어 그 중에서도 ‘시조’라는 양식에 담긴 언어로 접근하는 의식적 작업이 긴요하게 요청된다. 이때 굳이 ‘의식적’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조오현 시학과 불교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의 언어가 선적(禪的) 속성과 시적 속성으로 넘나들면서 형식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에게 현대시조는, 그만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경험과 시적 언어의 함축성이 결합된 생생한 언어의 현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길지 않은 글을 통해 조오현 시조 조오현 스님의 시편들은 모두 ꡔ萬嶽 伽陀集ꡕ(만악문도회, 2002)에서 인용하였다.
를 검토함으로써, 합리성의 신화를 넘어 자신만의 인식론적․미학적 진경(進境)을 이루어놓은 한 시인의 언어를 경험함과 동시에, 한국 현대시조가 이루어놓은 첨예한 하나의 성취를 개관하게 될 것이다.


2.

조오현 시학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는, 오랜 시간 속에서 모든 개념적․경험적 경계선을 지워가는 일련의 통합적 사유 과정에 깃들여 있다. 이때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타아(他我)’인데, ‘타아’란 개인 의식의 통일체로서의 ‘자아(自我)’에 대하여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타자의 아(我)를 뜻한다. 이 ‘타아’가 발화하는 언어를 통해, 시인은 지상의 분별지(分別智)가 구획지어놓은 수많은 경계선들을 해체하면서 궁극적으로 대립성이 소멸되는 통합 과정을 꿈꾼다. 그것은 “세속의 길을 구도를 향한 마음의 길에 잇대기 위해 성스러움과 속됨, 스님과 속인, 산중의 일과 세상잡사를 두루 포섭” 이선이, 선(禪) 혹은 열림의 언어. 열린시학 33호, 고요아침, 2004. 78쪽.
하려는 그의 통합적인 시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말하자면 조오현 시학의 무게중심은 지상으로부터의 일방적 몰입이나 초월에 있지 않고, 세속과 탈속(脫俗)의 불가분리성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사실과 허구(상상)가 궁극적으로 한통속임을 시적으로 표상하는 데 있는 것이다. 가령 시집 첫머리에 실려 있는 다음 시편을 보자.

강원도 어성전 옹장이
김 영감 장롓날

상제도 복인도 없었는데요 30년 전에 죽은 그의 부인 머리 풀고 상여잡고 곡하기를 “보이소 보이소 불길 같은 노염이라도 날 주고 가소 날 주고 가소” 했다는데요 죽은 김 영감 답하기를 “내 노염은 옹기로 옹기로 다 만들었다 다 만들었다” 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그날 상두꾼들
소리였대요.

― 무설설(無設設) 전문

한 옹장이의 죽음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일정한 서사를 표현하고 있는 이 시조 작품은, 중장을 파격하면서 그 안에 상상적인 대화 양식을 집어넣고 있다. 옹장이 김 영감의 장례를 치르는 날 들려온 “상두꾼들/소리”를, 시인은 죽은 김 영감과 그 전에 이미 죽은 그의 아내가 주고받는 대화 방식으로 풀어본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발화의 주체가 부부의 것이든 김 영감을 떠메고 나가는 상두꾼들의 것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면서 김 영감이 가슴에 품었을 “불길 같은 노염”과 실제의 불길 속에서 차츰 완성되었을 “옹기”의 상호 전화(轉化)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허구 혹은 삶과 죽음의 상상적 통합 과정이야말로 온갖 분별지가 구축한 미망(迷妄)의 악순환을 일시에 걷어버리는 언어적 실천이 된다.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 “바다에 가면 바다/절에 가면 절”(무설설)이 된다면서 사물과 의식의 통합에 대한 지향을 보인 것이나, 사물의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흐르는 반석 밑으로/물소리나 들을 일”(무설설)이라는 전언을 보인 것은 모두 이와 연관된다. 그래서 더없이 확연한 것은, 사물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양상이고, 더 나아가서는 ‘부재’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존재’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무자화 - 부처 전문

조오현 시인의 ‘무자화(無字話)’ 연작은, 말 그대로 언어를 통하지 않은 이야기를 지향하면서, ‘질서’로서가 아닌 ‘심연(深淵)’으로서의 언어적 형상을 잘 보여준다. 이 시편에서 ‘강물’이라는 기표는 흘러가는 자연 물질의 질서를 지칭하지 않고, “강물도 없는 강물”이라는 역설을 취함으로써 그 물질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마치 “삶이 없는 삶”이나 “마음이 없는 마음”과 같은 심연의 상태가 될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궁극적 전언은 “강물도 없는 강물”을 흐르게 하고 범람하게 하고는 정작 “떠내려가는 뗏목다리”로 표상되는 ‘부처’의 존재 속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선사들이 추구하는 ‘운수시(雲水詩)’의 경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의 형이상학을 내밀하게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편의 최종적 발화자는 누구인가? 시인인가, 부처인가, 허구적 화자인가? 여기서 시편을 움직이는 최종적 발화자는 어떤 특정인이 아니다. 존재가 스스로를 열고 부르는 목소리를 시인이 받아 적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존재를 ‘보는 자[見者]’요 ‘듣는 자[聽者]’에 머물 뿐, 정작 그것을 ‘말하는 자[發話者]’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존재한다. 이는 휠라이트(P. Wheelwright)의 ‘예각성(presential)’ 개념과도 상통하는데, 그것은 “청정하고 무욕한 마음으로 타자에게 귀를 열어 그의 말을 들어주거나, 타아(他我)의 실존 속에 그 자신이 스스로 타자가 되어줄 때 대상이 드러나는 진실” 휠라이트(김태옥 역), 은유와 실재, 문학과지성사, 1982. 153-154쪽. 오세영, 우상의 눈물, 문학동네, 2005. 84쪽에서 재인용.
을 뜻한다. 조오현 시학의 비밀은 이 같은 존재의 예각성 속에, 그리고 존재 스스로 자신을 열고 들려주는 타아(他我)의 목소리 속에 담겨 있다 할 것이다.


3.

그렇다고 조오현의 시편들이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불성을 깨닫고 부처가 된다[直指人心]’라는 선적 경지를 계도하거나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심적 초월의 경지를 보여주는 데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이 같은 선적 인식과 의지는 추상적 담론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시조 양식이라는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틀 속에 담김으로써 시적 언어의 육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시편들은 이 같은 시조 미학의 뚜렷한 사례들이다.

해장사 해장 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 하십니다.

― 산일(山日) 전문

한나절은 숲 속에서
새 울음소리를 듣고

반나절은 바닷가에서
해조음 소리를 듣습니다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내가 듣게 되겠습니까.

― 산일 전문

「산일」에서 시인은 “해장사 해장 스님께/산일 안부를” 묻는 과정과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들오리가 놀다 가고//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잠겨 있다”라는 스님의 답변 과정을 병치하고 있다. 이는 질문의 각도와 답변의 각도를 어긋나게 함으로써, 분별지가 구축해놓은 합리적 개연성을 지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발화 방식은 예컨대 “지난 달 초이튿날 한 수좌가 와서/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길래/내설악 백담 계곡에는 반석이 많다고 했다.”(무설설)라는 시적 전언과도 깊이 밀착된다. 그런가 하면 뒤의 시편에서 시인은 “한나절은 숲 속에서/새 울음소리를 듣고//반나절은 바닷가에서/해조음 소리를” 듣는 반복적 과정을 통해 “언제쯤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자성(自省)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결국 두 시편에 나오는 “산일 안부”라는 외적 발화와 “내 울음소리”라는 내적 발화는 시인이 궁극에 가 닿고자 하는 실존의 깊이를 뜻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시인은 사물들이 내지르는 울음소리와 자신의 몸속에서 파동치는 울음소리를 하나의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한 울음소리들은 “산에 살면서/산도 못 보고//새 울음소리는커녕/내 울음도 못 듣는다.”(일색과후(一色過後))라는 진술이나, “경칩, 개구리/그 한 마리가 그 울음으로//방안에 들앉아 있는/나를 불러 쌓더니//산과 들/얼붙은 푸나무들/어혈 다 풀었다 한다.”(출정(出定)), “조실스님 상당(上堂)을 앞두고/법고를 두드리는데//예닐곱 살 된 아이가/귀를 막고 듣더니만//내 손을/가만히 잡고/천둥소리 들린다 한다.”(파지(把持))라는 진술 등에 고루 산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새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 천둥 울음소리, “내 마음 허심한 골에/뻐꾸기”(직지사 기행초 - 가는 길) 울음소리, “먼 바다 울음소리”(파도) 등은 모두 시인 내부의 울음소리가 외적으로 현시(顯示)된 것일 뿐이다. 시인은 그 울음소리에 깊이 귀기울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귀기울이는 경책(警責)과 성찰의 의지는 “우리 절 밭두렁에/벼락맞은 대추나무//무슨 죄가 많았을까/벼락맞을 놈은 난데//오늘도 이런 생각에/하루 해를 보냅니다.”(산일(山日))에서처럼 자신을 다잡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자성의 단호함이 단형의 시조 양식 속에 담김으로써, 시인이 들려주는 내용과 시적 형식은 단단하게 결속하고 있는 것이다.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소리 들을라면

들어도 들어 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 일색변(一色邊) 전문

이 작품에 담겨 있는 것은 ‘바위’의 묵언지의(言之意)이다. 유(有)와 무(無), 사물과 본질, 미망과 깨달음을 모두 넘어선 일색의 가장자리(경계)를 노래함으로써, ‘바위’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시인의 정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그루 늙은 나무도/고목소리 들을라면//속은 으레껏 썩고/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그 물론 굽은 등걸에/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일색변)라든가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중놈소리 들을라면//취모검(吹毛劍) 날 끝에서/그 몇 번은 죽어야//그 물론 손발톱 눈썹도/짓물러 다 빠져야”(일색변)에서처럼, 오랜 내성(內省/耐性)의 시간을 축적한 끝에 얻어지는 선적 경지와 의미론적 등가를 이루고 있다.
물론 ‘선’의 시편들은 오도(悟道)의 형이상학적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비약과 초월의 시적 발상과 기상(奇想)이 흔하게 동원된다. 또한 그 안에서는 상대적 가치들이 일원론적으로 융합되어 일체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진경(眞境)이 제시된다. 초월자의 혜안에서 바라본 진여계(眞如界)를 제시하기 위하여 지각 경험이 결코 재현해낼 수 없는 절대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오의(奧義)의 연쇄가 발견되기도 한다. 조오현 시학의 가장 종요로운 지향 역시, 이 같은 진경 속에서 간취된다. 하지만 그것은 초월의 상상력에 의해 비약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상의 모든 대립성이 소멸되는 통합 과정 속에서 타아의 목소리를 듣는 모습으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묵언정진(默言精進)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조오현 시학의 참된 구도(構圖/求道)라 할 것이다.


4.

조오현 시인이 종내 보여준 이 같은 사유와 발화 방식은 이른바 ‘현상학적 환원’에 가까워진다. 이는 주객의 분리나 이성적 사유에서 벗어나 직접적 전체적으로 존재를 만나는 경험이며, 경험적 이성적 판단을 일시에 폐기시키는 행위이다. 또한 이는 ‘신화(神話)’나 ‘역사(歷史)’ 같은 집체적 시간 경험이든 개인적 시간 경험이든 그 안에 담겨 있는 근대적 시간관을 부정하면서 씌어지는 시편들을 통해 드러나는 경험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최상의 수행성을 강조해온 우리 시대의 담론적 운산(運算)들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 담겨 있다. 이 같은 의식이 과정적(過程的) 흐름을 통해 구체화된 결실이 바로 무산심우도(霧山尋牛圖)이다. 원래 ‘심우도’는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지나 동자(童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불교 선종화(禪宗畵)이다. 모두 10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는 인간 본성에, ‘동자’나 ‘스님’은 불도(佛道)의 수행자에 비유된다. 이것을 ‘무산(霧山)’의 이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생선 비린내가 좋아 견대(肩帶) 차고 나온 저자
장가들어 본처는 버리고 소실을 얻어 살아볼까
나막신 그 나막신 하나 남 주고도 부자라네.

일금 삼백 원에 마누라를 팔아먹고
일금 삼백 원에 두 눈까지 빼 팔고
해 돋는 보리밭머리 밥 얻으러 가는 문둥이어, 진문둥이어.

― 무산심우도(霧山尋牛圖) 중에서

도주한 범인을 찾아 체포하는 상황의 비유를 통해 '나'의 행동적 표지(標識)를 세워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연작시편은, 위의 결구(結構)에서 보듯, 시인의 궁극적 심우 과정이 일종의 ‘파계’ 이문재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 ‘파계’는 결코 파계가 아니다. 진정한 출가이다. 화살 같은 마음을 좇아 인간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호방한 웃음 끝에 한소식을 얻었지만, 그 한소식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문재, 마음과 싸우기의 어려움과 아름다움, 조오현, 산에 사는 날에, 태학사, 2001. 87쪽.
형상으로 귀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읽어볼수록 하나의 선화(禪話)적 구성을 취하고 있는 이 연작시편은 그래서 앞서 말한 세속과 탈속(脫俗)의 불가분리성을 증언하면서 동시에 사실과 허구(상상)가 결국은 한통속임을 시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이 연작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만인고칙(萬人古則)이나 달마(達磨) 연작도 세심하게 살펴져야 한다.) 이처럼 모든 대립적 경계선이 지워진 곳에 조오현 시학의 궁극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삶의 즐거움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적멸을 위하여 전문

‘미물(微物)’을 통해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사라짐을 통해 시인이 이르는 곳은 ‘적멸(寂滅)’의 지경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일러 “기는 벌레 한 마리/몸을 폈다 오그렸다가//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배설하고/알을 슬기도 한다.”(내가 나를 바라보니)라고 묘사하기도 했거니와, 이러한 “황홀한 육탈(肉脫)”(견춘삼제(見春三題)) 과정이 적멸에 이르는 그만의 방도가 된다. 또한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일이다.”(산에 사는 날에)라든가 “하루는 종놈 되고 또 하루는 종년 되어/무시로 음식 찌꺼기나 얻어 그냥 좋아할 일이다.”(근음(近吟))에서처럼 사라져가는 미물로 자신을 견주는 유추적 상상력은 시인을 시인되게 하는 근원적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두둑 설해목 부러지는/먼 산 적막 속으로”(겨울 산짐승) 사라져갈 “내 삶도 헛걸음 헛보고 헛딛는다”(1980년 방문(1) - 내 삶은 헛걸음)라고 고백하고 있는 시인이 지향해갈 곳은,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 뿐이네.”(재 한 줌)라는 경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계’와 ‘사라짐’의 형상이야말로, 불가가 지향하는 정신적 고처(高處)의 시적 전언인 동시에, 시조 양식의 끊임없는 수정과 변형을 통해 시인이 가 닿고자 하는, 다른 양식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언어적 표상일 것이다.


5.

최근 현대시조를 둘러싼 쟁점은, 정형 양식이 갖는 장르로서의 효용성과 현대적 양식으로서의 항존성(恒存性) 사이에서 제기된다. 이때 우리는 시조가 비록 역사적 장르로서는 쇠퇴했지만, 그 안에 내용상 형식상의 갱신 가능성을 충일하게 품고 있는 언어적 양식임을 강조하려는 지향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살핀 조오현 시학은, 유가(儒家)가 지향해온 질서 정연한 이치를 담아내기에 적합한 시조 양식을, 불가적인 형이상학적 심연의 경험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새로운 시조 양식의 시사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조 양식의 끊임없는 갱신 가능성을 보여준 범례로도 기록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선(禪)’의 언어가 모순적이고 양립 불가능한 것들의 양립 양상 곧 양가성(ambivalence)에 대한 언어라는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우주적 존재(cosmic being)로서의 스케일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하찮은 미물 속에서 거리 개념이나 주객 분리의 개념이 급격히 소멸하는 과정을 경험케 하는 ‘선’의 언어는 그 점에서 초월적이고 비약적이다. ‘선’에서 말하는 오도(悟道) 내지 견성(見性)의 경험이 종교적 신비나 초월의 한 양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하지만 조오현 시학은 이 같은 초월과 비약에 대한 항간의 의구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미적 항체(抗體)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의 시학은 근원적으로 불이문자(不離文字)의 경지에서 구축되고 있으며, 세속과 신성, 마이크로와 매크로, 주체와 대상, 삶과 죽음의 인식론적 구획을 활달하게 지워나가는 통합의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초월과 비약을 경계하면서, 지상에서 씌어진다. 그의 시편들은 이러한 시적 통합 과정이 시조라는 정형 양식과 적극적으로 교섭하고 결합한 미학적 사례로 깊이 기억될 것이다.



유성호(柳成浩)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 평론 당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평론집으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한국 시의 과잉과 결핍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시조월드》 2005 하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