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양식적 위상과 쟁점
유성호(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현대시조의 위상
‘시조(時調)’라는 문학 양식이 현대문학에서 주류적 위상을 확보하기에는 그 조건이 매우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시조가 다른 문학 양식들보다 훨씬 선험적 강제 규정을 많이 받고 있는 양식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시조가 재래의 고전적 정서를 담아내기에는 안정적이지만 다양한 현대적 표정들을 표상하기에는 여러 모로 고색 창연한 양식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직도 ‘정형시’라는 외적 제약과 ‘고전적 장르’라는 완강한 이미지 때문에 시조는 현대문학에서 늘 주변부적 장르로 이해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고시조들이 유교 이념의 계몽이나 소박한 자연 친화적 경향을 드러냈던 데 비해, 현대시조가 현대인의 다양하고도 섬세한 정서를 담아냄으로써 지속적인 자기 갱신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특히 해체와 탈(脫)근대의 기획과 실천의 물결이 한바탕 쓸고 간 뒤에도, 현대시조는 정형적 한계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경계하면서 ‘절제’와 ‘균형’의 미학을 벼리는 시인들에 의해 다채로운 형식 미학적 변용을 이루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긍정적 현상을 계속 발전시킬 경우, 우리는 서구의 미학적 박래품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적 항체로 현대시조의 양식적 위상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같은 현대시조의 남다른 미학과 역사를 보여주는 절편(絶篇)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현대시조의 역할과 전망에 대한 하나의 관견(管見)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2. 최근 현대시조에 나타난 다양한 어법과 주제
우리 시대의 중진 시인들 가운데 남다른 적공(積功)과 정성으로 시조 시단을 이끌어온 이들의 시편들은, 우리 시대에 현대시조가 왜 존재해야 하며 또 어떠한 향방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적 지남(指南)이 되고 있다. 먼저 박시교 시조는 우리나라 시조단에서 정형 율격을 묵수(墨守)하면서 자기 세계를 고집스럽게 지켜온 대표적 풍경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 정형시가 주체와 세계간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잃어버린 ‘근원적 동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미학적 대안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주자가 바로 박시교인 것이다. 대개 좋은 정형시일수록 해체 지향의 파열음보다는 운율과 감각의 ‘동일성’을 지켜간다고 할 때,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정형 양식의 결속을 통한 ‘동일성’의 시학은 그만큼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
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
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
격格으로 치자면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
곧고 푸르른 혼 천년을 받치고 서 있는
의연한 조선 선비 닮은 저 산비탈 소나무
함부로 뻗지 않는 가지 끝 소슬한 하늘
무슨 말로 그 깊이 다 헤아려 섬길 것인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
― 박시교 「나무에 대하여」 전문
가령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이라 할 때, ‘나무’와 ‘사람’은 서로의 형질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넘나들고 있다. 원래 ‘나무’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형상(形象)을 하고 있지만, 시인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라면서 ‘나무’와 ‘사람’이 어떤 정신적 지경(地境)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은유적 가능성을 열고 있다. “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 꼭 닮았다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 비유하고 있는 ‘사람’이 물리적 범주가 아니라 가치론적 범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어서 시인은 “격格으로 치자면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곧고 푸르른 혼 천년을 받치고 서 있는//의연한 조선 선비 닮은 저 산비탈 소나무”라고 하면서 나무 가운데서도 ‘소나무’가 ‘격’과 ‘혼’과 ‘의연함’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나무가 갖는 외관상의 특징을 시인이 바라는 인간상에 이입시키는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시인은, “무슨 말로 그 깊이 다 헤아려 섬길 것인가//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라면서 나무의 고고(孤高)함이 인간이 닿아야 할 궁극의 표지(標識)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로써 시인은 사물과의 유비를 통해 생의 근원적 가치에 가 닿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간접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박시교 시학은 오직 ‘시’를 통해서만 그리움의 대상들을 하나하나 들여앉히는 상상적 언어의 세계가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우걸은 “아직도 우리 몸 속엔 금속성 파편이 있다”(「아직도 우리 몸 속엔 ― 휴전 50년」)라면서 우리 역사와 사회에 패인 역사적 ‘상처’에 깊이 주목한다. “그 술병에, 빠져죽은 독재”(「시바스리갈」)를 풍자하다가도, 「산인역」에서처럼 우리 사회의 그늘진 아픔에 대해서도 그는 깊은 성찰을 행한다. 이우걸 시인이 현실 인식과 알레고리를 미학적으로 결합한 대표적 시인임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8월 하순 다 낡은 국밥집 창가에 앉아
온종일 질척이며 내리는 비를 본다
뿌리도,
없이 내리는
실직 같은 비를 본다
철로 건너편엔 완만한 산자락
수출처럼 난만하던 철쭉꽃은 지고 없는데
살아서 다졌던 생애의
뼈하나 묻히고 있다
― 이우걸 「산인역」 전문
‘실직’이나 ‘수출’ 같은 비시적(非詩的)인 어휘가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시적 상황과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내면 하나를 사회성과 결합시켜 형상화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그림자에 뒤섞인 저 손끝의 떨림으로/아침이 목련을 빚듯/한 선율을 빚어”(「피아노」)낸 결과가 된다. 그래서 이우걸은 “정박지를 몰라서 방황하긴 했지만/내 배는 언제나 사랑을 싣고 다녔네”(「배」)에서처럼 ‘사랑’을 본령으로 삼은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시교, 이우걸 같은 시인들이 보여준 현대시조의 음역은 서정성과 자기 동일성, 현실 인식과 알레고리, 실존적 생이 갖는 고통과 연민 등을 두루 보여줌으로써 현대시조의 넓은 음역을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시조의 형식적, 내용적 진경(進境)은, 최근 열정적으로 자기 개진을 보여주는, 어느 정도 자신만의 고유한 시력(詩歷)을 축적해온 중견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의 시편 속에는 삶의 고전적 가치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다. 이 또한 ‘시조’라는 양식이 근원적으로 지니고 있는 삶의 고전적 지혜에 속하는 영역이다.
익을 대로 익은
바람
빗질마저
쪽빛이다.
햇빛이
제 살을 풀어
한 올
한 올
세는 동안
꼿꼿이
머리 세운 채
진사경(眞絲經)을 외는
누에.
― 권갑하 「적멸」 전문
흔히 ‘적멸(寂滅)’이라 함은 사물들의 모든 가시적 형식은 물론 그 흔적마저 철저히 소멸되어버리는 과정을 명명한 것이다. 그래서 ‘적멸’은 절대적 소멸의 형식을 띠지만, 반대로 그 순간 또 하나의 절대가 현현하는 순간을 함의하기도 한다. 이때 또 하나의 절대는 시인의 서정적 관조를 통해 죄다 드러나는 사물들의 속내이다. 이 시는 전반부에서 ‘바람’과 ‘햇빛’에 대한 묘사에 정성을 들이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 ‘누에’로 그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른바 ‘클로즈업’ 기법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시선의 집중성은 물론, 순간의 형식에 시간을 붙들어매는 시적 의장(意匠)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과 ‘햇빛’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있는 순간의 누에가 “진사경(眞絲經)을 외는” 것처럼 보인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모든 사물들이 서로 교융(交融)하는 생생한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 또한 순간성의 포착이지만,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반복과 퇴적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시조에서의 ‘자연’은 시적 주체의 내적 정서와 유비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고시조에서의 관념성을 현저하게 덜어낸 것이며, 내면으로의 일방적 칩거라는 근대시의 부정적 자폐주의를 극복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대시조는 고시조의 전통에서 중요한 전통적 요소를 결하고 있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현대시조에서 자연은 ‘노동’의 구체성이 빈곤하게 나타난다. 대개 자연은 그 안에 생활의 역동성보다는 시인의 정서와 친연 관계를 이루는 배경(背景)으로 존재한다. 또한 현대시조는 자연을 풍경 그 자체로 그리는 것에는 매우 취약하다. 이는 자유시에서 현저하게 자연 스스로 어법의 주체가 되게 하는 작법이 많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비추어 보면, 정형 양식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측면이라고 하더라도 아쉬운 대목이다.
그 어떤 길에도 나, 깃들이지 못하여
길들이는 길의 손을 선뜻 잡지 아니해
길 밖을 오래 걸었네
털만 잔뜩 세운 채
무한질주 대로에서 살내 나는 골목으로
결국은 집으로 수긋 드는 길을 보면
그 끝의 여윈 등불이 신생의 꽃인 것을
그 꽃에 깃들이면 꿀 같은 잠을 먹고
굽었던 하루의 목도 한껏 피는 것을
일용할 희망의 곳간 거느릴 길을 잊고
겨운 사랑 하나 내려놓지 아니해
밟고 가라, 꽃잎처럼 저물도록 눕지 못해
집 밖에 여직 서 있네
옛길이 매우 치네
― 정수자 「길 밖을 오래 걷다」 전문
이 작품은 정수자의 시적 주제를 잘 집약하고 있는 시편이다. 여기서 보이는 “집 밖에 여직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어떤 길에도 나, 깃들이지 못하여/길들이는 길의 손을 선뜻 잡지 아니해/길 밖을 오래 걸”은 시인은 “결국은 집으로 수긋 드는 길을 보”고도 “겨운 사랑 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집 밖에 여직 서 있”다. 그래서 시인은 계속하여 “지상의 모든 창이 따뜻한 길이 되어/지친 발들 당기며 안으로 빛나는 녘/오늘도/먼 길에만 끌리다/나, 또 집을 놓치”(「저물 녘 집을 놓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해완의 시세계는 역사의 어둠을 온몸으로 겪은 서정적 주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하고’ 밝은 서정으로 그 세계를 극복하려고 하는, 말하자면 ‘역사적 상상력’과 ‘근원적 그리움’이 결합된 아름다운 세계이다. 물론 그 어둠의 원인이나 시인이 겪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그리고 피해 양상은 행간으로 은폐되고 있다. 다만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는 ‘그리움’이라는 정서에 의해 그와 같은 일련의 상처들이 강하게 암시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말해서, 바로 그 ‘그리움’과 ‘상처’가 ‘환함’을 불러오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반전(反轉)의 상상력이 그로 하여금 일관된 ‘희망’의 원리를 견지하게끔 한다. 그와 같은 반전 혹은 역설의 세계관은 “한때/꽃이 아님을/서러워/하던” 단풍잎들이 이루고 있는 “장엄한/화엄(華嚴)의 세계”(「단풍」)를 새삼 발견하는 안목에서도 나타나거니와, 다음 작품에서는 그것이 역사의 어둠과 만나면서 더욱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영혼이 맑으면
육신은 죽어서도 아름다운 법(法).
흡사 뼈다귀 같은 새하얀 막대 하나
남도의 땡볕 아래서
전신(全身)을 태우고 있다.
그래,
너는 전생(前生)에 푸르른 대나무였지.
네 곁에선 죽은 것들도
산 듯이 보였었고
스치는 한 점 바람도
푸른 목숨을 얻어 갔지.
살아서는 하늘을 향해
올곧은 가지를 펴고
죽어서는 네 육신이 만 갈래로 갈라져도
너의 그 청빈한 손이
어린 고추모를 일으켜 세우는구나.
― 이해완 「고춧대」 전문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상상력은 마치 만해(萬海)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알 수 없어요」)라고 노래한 것과 동일한 맥락인 일종의 ‘윤회사상’의 잔영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남도의 땡볕 아래서/전신을 태우고 있”는 “뼈다귀 같은” 형상의 고춧대는 “전생에 푸르른 대나무”였다. 그 “맑은 영혼”이 죽은 다음 피어나는 “죽어서는 네 육신이 만 갈래로 갈라져도/너의 그 청빈한 손이/어린 고추모를 일으켜 세우는구나.” 하는 과정이 그 같은 상상력을 역사적 층위로 끌어올리면서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5월 광주’를 연상시키는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엄혹한 역사의 과정에서 늘 수난을 당해온 뭇 “푸른 목숨”들의 신생(新生)의 과정과 그 기원을 그린 시편으로 읽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내가 낸 빈틈으로
바람 숭숭 들어오니
얼마나 쌓였을까, 쓸쓸하던 저녁들
일어나
기댈 데 없이 허전하던 아침들
메운 듯 하면
또 벌어진 틈 보이고
커져만 가는 틈으로 모지라지는 나의 키
작아서,
작아서 서러운 울음 울어 나를 씻네
차를 달려 몇 마디
安否 주고받은 일밖엔
달라진 게 없는데, 나 그대로인데
내 안의
무엇이 움직였나,
훈훈한 바람 부니.
― 홍성란 「너를 만나고」 전문
모두 세 수의 평시조가 연결된 연시조 형식의 이 작품에서 시인은 “쓸쓸하던 저녁들”과 “허전하던 아침들”이 충분히 쌓여온 자신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시간의 틈으로 “바람”이 불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커져만 가는 틈으로 모지라지는 나의 키”와 연결하면서 동시에 “작아서 서러운 울음 울어 나를 씻”는 정화의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소멸과 치유는 이처럼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통합된다. 그러나 이 같은 전환은 “너를 만나고” 생긴 일이다. 그 ‘너’가 누굴까? 시인은 자신의 안에서 자신을 흔들던 것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만난 ‘너’이다. “나 그대로인데//내 안의/무엇이” 움직였을까? 그것은 “내가 낸 빈틈으로” 불던 ‘바람’이기도 하고, 마지막 수에 나오는 “훈훈한 바람”이기도 하다. 결국 시인은 “나 그대로인데” “너를 만나고”서야 자신의 몸 속이 흔들리고 움직였음을 역동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홍성란은 평시조 양식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일고 있는 미세한 움직임에 대해 한결같이 쓸쓸하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또한 사물과의 관계 형식을 통해 혹은 그 관계의 복원을 통해 생의 형식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 이달균의 시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선은 그의 시세계를 강렬한 희망보다는 생의 비극성에 눈뜨게 하였고, 신생하는 것들의 역동성보다는 저물어가는 것들의 눈부심을 기록하는 시인적 태도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 이달균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전문
소멸되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그것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는 시인의 예지는 단순한 시재(詩材)를 넘어 생의 본질적 형식에 육박한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라는 짧은 고백 속에서, 시인으로서의 실존과 의지와 절망과 우수를 다 드러내고 있다. 이때 그는 요설과 파격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아니라 장형의 형식으로 이 같은 고백을 단아하게 완성하고 있다. 여기서 “저무는 가내공업”이란 소멸과 사라짐의 운명을 응시하면서 시를 쓰는 자신의 남루하면서도 눈부신 영혼을 들여다본 이만이 가능한 언어가 아닐까 한다. 이처럼 소멸되어가는 것들의 이미지를 통해 생의 본질적 형식에 가 닿으려는 시인의 의지는, 그의 다른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 역시 소진과 퇴색의 흔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이처럼 중견 시인들이 보여주는 자기 갱신의 의지들은, 자유시 일변도의 우리 시단에 대한 적극적인 항체로 기억될 것이다.
3. 시조의 담론적 가능성 우리가 ‘시조’를 정형의 율격에 안정된 시상(詩想)을 담는 전통적인 시가 양식으로 인식하는 관행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조 문학에는 이미 ‘공통 감각’에 속하는 정격(正格)의 정서와 형식이 담기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고, 전통적인 정서로부터의 파격(破格)이나 그것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해체 지향의 언어들이 담기는 것은 다소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시조 미학은 그동안 사물과의 불화보다는 화해, 새로운 것의 발견보다는 익숙한 것의 재확인, 갈등의 지속보다는 통합과 치유 쪽으로 무게중심을 할애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단견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처럼 ‘단순성’이 아닌 ‘다양성’의 시대, 그리고 ‘서정’의 일원성보다는 ‘아이러니’의 복합성이 미학적 주류로 기능하는 후기 현대의 시대에 전통적 형식인 시조가 갖는 한계가 비교적 명백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정언에 비추어 볼 때,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상징되는 현대성의 징후들을 정형의 양식에 담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한계를 노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왜 꼭 시조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는 주체와 세계간의 균형과 조화보다는 그 사이의 미세한 균열과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는 시대이다. 주체의 내적 원리와 세계의 원리가 서로 소통하고 화응(和應)하는 계기가 태부족이고, 주체는 세계의 운동 원리에 대해 명료한 판단과 의식을 가지기 어려운 시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쓰고 읽는 시에 주체-대상의 화음(和音)보다는 그 사이에서 이는 파열음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파열음을 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일상화된 파열과 균열의 양상 속에서 아직도 ‘순간’ 속에 드러나는 사물의 ‘충만한 현재형’을 포착․표현하는 것이 시의 기능 중 다른 무엇에 양도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교양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고시조들은 ‘자연’을 이상적 형식으로 추구하였고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주제들을 형상화해온 경우들이 특히 많았다. 그래서 우리가 고시조를 읽을 때 그러한 주제에 동화(assimilation)와 투사(projection)의 경험을 흔연히 치러온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시조의 화자와 청자는 입장을 달리해 미적 균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인과론, 이성에 의한 예측 가능성, 계기적인 선형적(線形的) 사유들이 많이 그 힘을 잃고 그 대신에 불확정성의 원리, 불온한 상상력, 입체적이고 다양한 아이러니적 사유 등이 세계의 실재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모든 시 창작의 근원적 동기가 자기 확인의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할지라도,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그 ‘거울’조차 반질반질하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흐리고 어둑하며 심지어는 깨어진 거울일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깨어진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은, 나르시스처럼 매혹에 가득찬 모습이 아니라, 자기 연민 내지는 자기 부정의 갈등을 가져다주는 복합성의 얼굴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매혹과 몰입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환경적 모순과 맞서고 있는 자신에 대해 사유하고 표현하려 한다. 이 같은 모순과 갈등의 이중적 의미를 표현하는 미학적 양식이 ‘아이러니’라고 할 때, 우리 시대에는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정서보다는 주체와 사물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과 불화를 암시하는 ‘아이러니’가 다소 유력한 방법이자 양식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현대 사회의 복합적 특성과 시조의 안정적이고 화해로운 양식적 특성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이 시조의 육체를 입는 한, 율격적 정형은 섬세하게 지켜져야 한다. 시조를 쓰면서 시조 고유의 선험적 율격을 해체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모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달려 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 사이의 활발한 교섭과 통합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최근 씌어진 시조 몇 편을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많은 현대시조들이 ‘감각’의 충실성과 ‘시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물의 ‘기억’에 대한 자각 등에 의해 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체의 유니크한 체험들이, 대상과 평등 관계를 형성하면서, 둘 사이의 자연스런 교감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완성되고 있다. 그것은 대상과의 불화나 그 사이의 균열보다는 친화와 동화의 과정이 육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 현대시조는 현대성과 시조성(時調性)을 동시에 구현하려 할 때, 이 같은 정격의 형식과 파격의 내용을 어떤 균형 감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 미학적 과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언어, 습속, 정신, 위의(威儀)를 그 안에 자연스레 내장하고 있는 ‘시조’는,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시대의 풍속과 이념 그리고 보편적 정서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표상해온 우리 문학의 정수(精髓)이자 보고(寶庫)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시조의 정형적 한계를 적극적으로 경계하면서 ‘절제’와 ‘균형’의 미학을 벼리는 시인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각이 불모에 빠져 있는 시조 비평의 첫걸음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론과 창작만 있는 시조 시단에 평론의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들을 통해 결국은, 우리는 우리 시단에 만연한 서구의 미학적 박래품(舶來品)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적 항체(抗體)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서구적 특수성에서 자라난 여타의 역사적 장르와는 다른, 우리의 언어적․세계관적 특성을 토양으로 발전되어온 시조를 더욱 애정있게 계승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 시조가 음주사종(音主詞從)의 가창적 특성이 사상되고 문자 예술로서의 지위만을 굳히게 되면서, 우리 문학에서 시조는 급격히 근대적 자유시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제 그 문학사적 공백을 우리 시대의 시적 주체들이 민감하게 반성하여, 현대시조에 대한 형식적․내용적 탐색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살핀 작품들은, 시조가 사멸해가는 전통 장르가 아니라, 그 안에 내용상․형식상의 갱신 가능성을 충일하게 품고 있는 언어적 실체임을 실증하는 사례로 기억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우리 현대시조가 지나치게 ‘동일성의 원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함을 알려준 실례이기도 하다. 그만큼 정형 양식으로서 시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선험적 규정을 충실히 지켜가야 한다. 최근의 실험 양식 중에는 단형시조 내에서 율격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보이는데, 그러한 시도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인지 깊이 자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율격을 섬세하게 지키면서 다양한 삶의 양상을 반영하는 일 즉 사람살이의 구체적 문제를 도입하여 근본적 고민을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시조 양식은, 내용 면으로는 안정된 시상을 그리고 소재로는 자연이나 풍경, 정신적 지향을 많이 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인지 사람살이의 구체적인 면이 매우 취약하다. 시조는 시조가 가지는 형식적 제약을 받으면서도 다양한 현실적 고민을 변화 있게 담아내야 한다. 그 동안 보여준 시조 작품들이 균형있게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었지만, 이런 면을 더욱 깊이 천착하여 작품에 적극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4. 현대시조의 발전과 저변 확대 우리 현대 문학 전체에서 현대시조가 차지하는 권역은 여러 면에서 주변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은 개인 내면의 자율성과 사회 현실의 구체성을 매개하고 통합하려 한 근대 문학의 일반적 속성을 충족하기 어려운 전통과 형식을 갖고 있었던 데다, 시조를 역사적으로 재생시키려고 했던 이른바 ‘시조부흥운동’ 자체가 이념적․미학적 수세를 만회해보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바 크기 때문에, 근대적인 문학적 주체들로부터 싸늘한 외면을 받아왔던 것이다. 또한 현대시조는 율독(律讀)을 통해서만 그 정형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며,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조 자체의 양식적 요소보다는 시적 표현이라는 시 일반론적 요소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정형 양식으로서의 독자성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대시조는 우선 율격적 측면에서 정형시에 속함으로써 정해진 형식적 제약을 감내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서정 갈래에 속한다는 점에서 근대 자유시와 다를 바 없는 발상과 이미지를 추구하게 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특장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적 조건이 현대시조로 하여금 한 시대의 주류 장르로서의 시효를 마감하게 한 주(主)요인으로 작용하였지만, 현대시조의 양식으로서의 위의와 가능성은 오히려 우리 시대에 점증(漸增)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근대’에 대한 재해석과 반성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원형에 대해 탐색하는 이른바 탈(脫)근대 혹은 반(反)근대의 열정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조성’과 ‘현대성’의 결합을 통한 현대시조의 양식적 가능성은, 율격의 해체나 무분별한 이완에 가까운 근대 자유시에 대한 일정한 반성의 몫도 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시조의 역사를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하고, 앞으로 현대시조가 지향해가는 몫을 애정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현대시조사의 우뚝한 인물들이 남긴 미학 세계를 매우 섬세하게 재구성하고 그 미학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시 교육이 획일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상과 어법이 가능함을 주지시키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때 시조 교육의 중요성이 도래함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 일이다. 시조를 열심히 읽고, 장르의 속성을 공부해가는 축적의 과정 속에서 시조에 대한 안목이 열려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조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거듭 던져야 할 시점이다. 이는 곧 현대시조의 발전과 저변 확대와 깊이 연관된다. 그래서 매체를 더욱 늘리고 문화적 투자 개념을 늘려야 한다. 따라서 현대 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조는 그 담론적 가능성을 증폭해갈 것이다. 5. 여적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토론 과제로 제출코자 한다. 1. 사설시조와 자유시는 그 성격이 다르다. 특히 시조의 중장에서 의미를 확장하고 종장에서 시상을 수습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사설의 양식은 일정 부분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시조의 본류일 수는 없다. 즉 양식의 보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양식의 무한 확장보다는 미학적 견고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2. 현대시조에서는 음보율이 보편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사람마다 걸음걸이는 다르다. 창작자의 심리적 호흡을 독자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 언어적 특성상 자수율 혹은 음수율의 규정이 제1의 원칙 즉 정격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 위에 음보율이 기능해야 한다. 3. 역사적 장르로서는 소멸되었지만 시조의 양식으로서의 지위는 분명 지속되고 있다. 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시조의 필요성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창작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조는 독자의 입장에서 시조라고 생각하고 읽을 때 기대 지평이 있는 것이다. 근대시가 율격을 등한시한 부분에서 문제가 되었고, 현대시는 무한하게 열린 구조가 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어서 시조를 통한 구심력의 회복이 요청된다. 자유시가 놓치고 지워버린 것을 시조가 회복해야 한다. 시조가 다시 주류로 오를 수는 없겠지만, 시조만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현대인의 삶을 내용으로 하되 완결성과 율격성을 지키면서 문학성을 고양해나가야 할 것이다. 4. 교과서를 보면 자유시는 편수도 많고 최근의 시인들까지 포함이 되고 있는데 비해 시조는 아직도 고전적인 시인들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교과서 편제에서 시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계량적으로 보나 입시에 반영되는 비율로 보나 아니면 교사들이 중요도를 인지해서 가르치는 비율에서나 아주 빈약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지금 우리 시대에 걸맞지 않는 양식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시조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부정적 현상이다. 가령 중학교 교과서에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상옥 선생의 <봉선화>, 유재영 선생의 <둑방길> 두 작품이 실려 있고,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는 이은상 선생의 <가고파>와 정인보 선생의 <자모사> 일부분이 실려 있다. 물론 검인정 문학 교과서를 포함하면 좀더 많은 작품들이 실려 있을 텐데 이런 것들이 시 교육에서 시조가 차지하는 빈약함을 보여주는 지표 같다. 시와 시조의 균형을 놓고도 여러 가지 지적이 있는데 비록 교과서 수록 편수가 적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시조가 오늘날에도 왜 필요한가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5. 매체적 조건이나 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야 하고, 현실을 따라갈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조 비평을 적극적으로 유도할 좋은 시조 텍스트들을 생산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시조시인의 내부 소통 구조도 문제가 된다. 비평가들이 꺼리는 경우도 있고 폐쇄 구조도 심하다. 비평가들에게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세미나 등에서 시조 비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다수 제공하고 시조를 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매체에서 저변 확대를 해야 한다. 현재 10종 이상의 전문지에 시조가 실리고 있는데 시조 비평이 부족하므로 대등하게 논의될 수 있는 기회 마련이 필요하다. 전문 평론가들은 시조 비평을 꺼린다. 시조 비평서를 내기도 힘들고 인정받기도 힘든 데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회의도 따르기 때문이다. 더불어 독자들에게 잘 읽히지도 않는다. 월간지나 계간지에 시와 시조를 섞어서 비평하는 경우에는 또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난점도 따른다. 시조를 지속적으로 비평받게 하려면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시조적 속성들이 나와야 한다. 좋은 작품으로 넉넉한 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냉정히 되돌아보아야 한다. 6. 시조의 양식적 고유성을 살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번역이 힘들다. 영어는 어휘적 자질이 강한 언어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시조는 독특한 율격을 가지고 있기에 영어로 시조의 율격을 살리는 것은 어렵다. 의미나 이미지를 최대한 강조해서 전하는 수밖에 없다. 일본의 하이쿠 같은 경우는 이미지를 병치해서 세계 문화 속에 심어주는 테크닉을 발휘하고 있다. 7. 문화예술위원회 ‘힘내라 한국문학’ 프로젝트 선정위원 가운데 시조를 빼자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도 있다. 시조를 독립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관광부에서 하는 사업에서 배분은 적더라도 시조를 따로 독립시켜 대상자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양보다는 질적인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을 해야 한다. 시조시인들이 시조의 질적인 고양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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