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하나의 미열, 예술은 그 통증이다 [원로 시조시인 백수(白水) 정완영 시인과의 대화] |
대담 : 권갑하(계간 《나래시조》 회장 겸 주간) 사진 : 이원식 시인(계간 《나래시조》편집장) |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직지사 여름 시인학교를 연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개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문학의 태반이라 할 수 있는 직지사 가까운 곳에 서재를 마련하고 한 달에도 몇 차례 그곳에 내려가 머무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 알다시피 고향 김천에 조그만 농막을 지어 놓고 서울에 일이 없으면 그곳에 내려가는데, 한 달에 두어 번 왕래를 해요. 날짜를 안 잊으려고 작년 6월 25일에 짐을 싸 김천에 내려갔는데, 벌써 1년 3개월이 되었네요. 그 사이 전국 각지에서 많은 문인들이 잊지 않고 찾아줘서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어요.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올해 내가 88세 미수(米壽)인데, 김천에다 집을 마련한 것은 안식구가 세상을 뜬 뒤의 외로움도 조금 잊고 또 그런 저런 심성을 달랠까 해서였어요. 그런데 서울 오르내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나 혼자 못 내려가니 비용도 추가로 들고, 그래도 안 내려갈 수 없는 것은 건강상 서울에 있기가 힘들어서예요. 탁한 공기도 그렇고 잡다한 소음과 내가 주로 지하철로 나들이를 하는데 지하철의 역겨운 냄새도 참기 어렵고 또 이런 저런 구조물들을 보는 것도 어지러워요. 김천 집에 내려가면 한적한 농촌이라 앞에 들이 20리 이상 탁 트여 있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돼요. 당나라 초기의 문장가 하지장(賀知章)의 시에 이런 게 있어요. “少小離家老大回, 鄕音無改빔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젊고 어려서 고향을 떠나 늙고 커서 돌아왔는데, 고향 사투리는 그대로지만 내 귀밑머리는 쇠했고, 아이가 알아보지 못하고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는 거지요. 늙고 병들어서 고향에 돌아오면 이처럼 서글퍼요. 1400년대의 시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심정은 다를 바가 없어요. 나도 그런 마음으로 〈고향은 없고〉라는 시를 쓴 적이 있지요. “고향에 내려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 / 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 / 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 ― 물론 낯설고 힘든 점도 있겠지만, 문학의 태반인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감회도 있고 나름대로 큰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요. ▲ 당초엔 나도 그런 점을 생각하고 내려갔는데, 생각보다 더 적막한 경우도 있어요. 나는 무엇보다 건강 때문에 쉬기 위해 김천엘 갑니다. 그래서 당호도 ‘삼오야서(三五野墅)’라고 했어요. 15평의 작은 농막이란 뜻이지. 고향 문인들과는 개인적으로는 만나지만 단체로 특별히 만나는 것은 아직 없었어요. 그런데 경주·울산·청주·대전·전주·영주·안동 등 전국 각지의 문인 단체들이 문학기행차 찾아와 강의를 듣고 가곤 해요. 지난해에는 김천예술회관에서 시장 초대로 ‘백수서화전’을 열었어요. 60여 편의 시를 서각(書刻)해 1주일간 전시를 계획했는데, 호응이 좋아 1주일을 더 연장했었어요. ― 지난해부터 김천시의 후원으로 백수(白水)시조백일장이 계간 《나래시조》 주관으로 김천 직지사에서 개최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김천시에서 백수시조문학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문단으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는지요. ▲ 지난해 12월경 김천시로부터 문학관 건립을 위해 예산을 5억 세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나는 원래 섭외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인데, 시에서 알아서 해주니 고맙지요. 문협 김천지부 박기하 지부장이 내 제자인데, 그에 따르면 올해 다시 4억이 추가됐다고 그래요. 그런데 김천이 올해 혁신도시로 지정이 되어 땅값이 많이 올라 부지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내 문학의 태반인 직지사 근처에 자리를 잡으려니까 더욱 어려운 것 같아요. 올해 김천에서는 전국체전이 열려 다들 경황이 없어요. 그런데 문학관 건립이야 예산이 수반되는 문제이니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고 잘 알아서 하겠지만, 시청 담당관에게 이런 부탁은 했어요. 내가 나이가 많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추진위원회를 먼저 구성해줬으면 좋겠다고요. 내 정신이 지금만큼이라도 있을 때 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 그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일체의 자료를 인계해주고 싶은 거예요. 내가 죽으면 서류 뭉치, 육필 원고 하나 사실 내 자식도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해요. 지금 김천의 내 집에 있는 서각작품들만 해도 값어치가 자그마치 1억 정도는 되는데, 이걸 기증하고 싶지만 기증할 데가 없어요. ― 현대시조가 올해로 100년을 맞았습니다. 이를 기념해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고, 문예지들도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조가 처한 현실과 위상을 생각할 때 100주년 기념행사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나고 보니 아쉬움도 많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현대시조 100년의 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현대시조가 100년이 되었다고 하니 감개가 무량해요. 그런 점에서 100년을 기리는 기념행사 개최는 매우 뜻깊고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이를 계기로 일반 국민들에게 시조를 새롭게 이해시키고 시조의 위상도 다시 세울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기대로 나도 시조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었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가 들려와요. 다들 행사 그 자체에는 공감을 하는 것 같은데, 행사의 추진 주체나 방식,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는 것 같아요. 100주년 기념행사가 어느 개인이나 단체, 잡지사가 아닌 시조단 전체의 중의를 모아 대표성 있는 단체에 의해 추진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점이 나도 아쉬워요. 우리 시조단은 지금 너무 분열되어 있어요. 다들 뿔뿔이 노는 형국이에요. 물론 시조단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래서는 안 돼요. 시조잡지만 해도 10여 개에 이르고 한국시조시인협회 등 전국에 적지 않은 시조문학단체들이 결성되어 있는 만큼 이제는 이들 단체들이 힘을 합치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올해 100주년 행사도 이들 단체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체계적으로 추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시인의 바람이겠지요. ― 시조단의 아픈 곳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아마 전국에 있는 모든 시조시인들의 염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도 지난 5월 월간문학 좌담회 때 ‘전국시조단체협의회’ 구성을 제안한 바 있고, 현대시조 100주년 세미나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100주년 행사뿐만 아니라 시조가 교과서에서 소외되는 문제 등 시조단의 산적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꼭 필요한 선결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시조단의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중의를 모은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대구여사의 〈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잡은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는 것 같은데요. ▲ 그것도 그래요.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조시인 대부분이 ‘대구여사’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였잖아요. 나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지만, 〈혈죽가〉의 경우 종장의 뒷마디가 없는 걸 보면 창(唱)으로 불려지는 시조인 것 같은데, 이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잡아도 되는 건지 의문이 가요. 앞으로 이를 출발점으로 매년 기념행사도 하고 전통도 쌓아나가야 할 터인데,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시조시인이나 단체들이 좀 더 마음을 비우고 머리를 맞대었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또 어느 단체가 행사할 때는 다른 단체의 문인들이 참여를 안 하는 ‘편 가르기’ 식의 문단 풍조는 이제 버렸으면 해요. 우리 시조 문단만이라도 하나가 되어 한솥밥 먹는 모습을 보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늙은이의 바람입니다. ― 현대시조 100년을 맞으면서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시조의 위상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세기 서구문화에 휩쓸려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천시하고 배척하는 역사적 문화적 오류로 우리 시조가 서구에서 들어온 자유시에 밀려 폄하되고 소외되는 아픔을 겪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러한 시조의 위상과 관련하여 선생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 할 말이 많지요.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70여 년 전 일본의 어느 미대에서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내려가는데 학생이 느닷없이 이런 질의를 했어요. “선생님, 여기 천하제일 가는 미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 미인에게서 표정을 빼내도 미인일 수 있습니까?” 기발한 질문이었어요. 교수는 즉답을 못하고 다음 강의 시간에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천하제일 가는 미녀의 표상이 비너스와 모나리자 상인데, 이것들은 예술품에 불과하다.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박물관에나 있는 것이다. 나는 심장을 가진 가장 못난 사람을 미인으로 취하겠다.” 내가 왜 이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입만 벌리면 ‘민족문학, 민족문학’ 하는데, ‘민족문학’이란 게 뭡니까. 그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학이 민족문학 아닌가요. 중국에는 오언(五言), 칠언(七言)의 한시가 있고, 일본에는 단가, 하이쿠가 있고, 한국에는 시조가 있고, 서구에는 소네트가 있잖아요. 이게 민족문학인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가 명멸한 중국 6천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조를 ‘당송시대’라고 하는데, 이유는 당송시대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가 났기 때문이에요. 그 시대의 위대한 문화가 당송팔대가를 배출한 것인지, 당송팔대가로 인해 그 시대가 위대하게 되었는지, 아무튼 유관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당송팔대가가 없었다면 당송의 문화는 창조될 수 없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인류사는 정치사도 아니고 경제사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삶의 방편이지, 잘 살기 위해 구조를 만든 것이지 남기는 것은 아니에요. 인류사는 문화사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갔느냐가 그 민족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지, 어느 나라가 잘 살았고, 호사했느냐가 아닌 것입니다. 문화를 많이 남긴 민족이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5대 문화권을 찾아 답사하고 연구를 하는 것도 다 이 때문 아닙니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조는 한국의 표정입니다. 한국문학에서 시조를 빼내 버리면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됐어요. 백여 년 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러나 시조는 향가에 뿌리를 두고 있어 13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가요를 거쳐 그릇이 완성되었는데, 중요한 건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동안 모든 유입 문화를 소화해서 하나의 합일로 빗방울에 돌이 패이듯이 시조라는 그릇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런 점에서 시조는 우리의 맥박이고 내재율이고 표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꿔야 하는데 가꾸는 조건은 뭘까요. 일본은 1860년에 명치유신을 했어요. 당시 일본에도 서구문명이 해일로 덮쳤어요. 당시 각계에서 선구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때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라는 가인(歌人)이 있었어요. 그는 “정치·경제 학문만으로는 이 거센 외풍에서 우리 일본을 구출할 수 없다. 서구 선진문명이 들어오면 정치·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 것이라는 것은 다 침몰하고 만다.”면서 시의 도반들로 9인회를 만들어 ‘일본 시(하이쿠, 俳句) 짓기 운동’을 펼쳤어요. 그 뒤 명치유신 100주년 되던 해에 일본의 평자들이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가장 위대한 사람을 뽑았는데, 어느 경제인, 정치인, 학자보다 이 마사오카 시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어요. 오늘의 일본을 일으킨 사람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닌 바로 이 마사오카 시키가 일본을 살렸다는 평가였지요. 40여 년 전에 이 글을 읽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 결과 지금 일본엔 하이쿠를 쓰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라고 해요. 일본의 신시(新詩)가 세계를 뒤덮진 못했지만 일본의 하이쿠는 내가 알기로 지금 캐나다, 프랑스 교과서에도 들어가 있어요. 하이쿠를 모르면 지성인으로 대우를 받지 못할 정도라고 해요. 그런데 우린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시조라고 하면 낮게 보고 변방문학으로 몰아요. 문제가 크지요. ―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러한 현실, 시조가 처해 있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어떻게 하면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무엇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보시는지요. ▲ 글쎄요. 뭐니뭐니해도 우선 시조단이 분열하지 말아야 해요. 내가 강의를 가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누가 시조를 제일 잘 쓰냐는 거예요. 그럴 때면 나는 그 물음에 답하는 그 사람이 제일 잘 쓰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최고봉이라고 조금 해학적으로 답하고 말아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지요. 이런 현실을 가다듬자면 중심이 되는 시인들의 모임이 하나 있긴 있어야 돼요. 그런데 모두 자기가 핵심적이라 생각하니 문제지요. 다들 성주 노릇을 하려 하고, 작은 왕국만 만들려 하니 앞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이제 세월이 다 됐는데, 노파심이지만 좀 가닥이 잡히는 걸 보고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조를 잘 쓰는 사람이 많이 나오면 시조가 괄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손이 못나면 집안도 괄시를 받게 되잖아요. 이건 내 지론인데, 시조와 자유시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봐요. 예컨대, 자유시가 발레라면 시조는 한국 무용이고,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죠. 탯거리, 몸가짐, 걸음걸이가 달라야 해요. 그런 걸로 시조의 예술성을 높이는 재간 있는 시인, 자유시가 범할 수 없는 이런 매무새를 가진 시조를 쓰는 시인이 많이 나타났으면 하는 게 내 염원이에요. 잘 쓰나 못 쓰나 나는 올해로 시조를 60년이나 썼는데, 내 시조는 탯거리가 좀 다르지요. 좀 고풍하면서도 위의가 있게 쓰고 싶어요. 요즘 젊은 애들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그건 서구 풍속이지. 아버지의 위엄은 존경스럽고 도저한 존재이지요. 시집가는 딸이 “아버지 사랑해요” 하는데, 이건 서양 사유지 우리 사유는 아니에요. 이런 걸 생각해서 〈우리 아버지〉란 동시조를 써본 적이 있는데, 이래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의 산이시다 / 뜰에 서면 뜰이 가득 방에 앉으면 방이 가득 / 아버지, 불러만 봐도 높고 푸른 산이시다.” 아버지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재지요. 옛날에는 그랬어요. 옛날 시에 보면, 아버지의 은혜는 ‘천고일월명(天高日月明)’이라, 높은 하늘에 해와 달이 밝듯이, 위엄으로 군림하는 존재지요. 그렇다고 독재하는 거 아니에요. 어머니의 사랑은 ‘지후초목생(地厚草木生)’이라. 땅이 두텁고 두터워 초록이 자라는 거다, 만물을 길러내는 거지요. 아버지는 해와 같아 없는 것 같아요. 시조가 그런 탯거리를 가져줬으면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하나를 더 예로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쓴 시가 40편 정도 되는데 이렇게 타이핑해서 갖고 다녀요. 가령 나쁘게 생각해서 집에 불이 나면 어떡해요. 족보는 안 갖고 다녀도 시는 갖고 다녀요. 좋고 나쁘고를 떠나 시조는 자유시와 다른 매무새를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종후청산(鐘後靑山)〉이란 시를 한번 볼까요. “꽃피는 봄 한철도 속절없이 사라지고 / 불타는 가을철도 이내 지고 말았는데 / 아 울고 떠나간 종소리 산이 혼자 듣습니다.” 이게 백수만이 하는 스타일이라. 이런 것이 동양화죠. 꼭 이렇게 쓰란 것은 아니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랩인가를 하는데 그런 건 신시에게 주고, 좀 더 함축성 있는 시조를 지었으면 해요. 그런 탯거리를 가진 사람이 많으면 시조가 괄시를 안 받아요. 일본 하이쿠는 400년 되었는데, 대종(大宗)이 3개 있어요. 하나의 큰 유파지요. 마쓰오 바쇼라는 사람은 깊고 그윽한 것, 심오한 것을 주로 썼어요. 잇사는 세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를 썼지요. 반면 부송은 좀 거칠면서도 장쾌하고 호쾌한 것을 썼어요. 그런데 그런 선생 밑으로 그런 학파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어요. 제자들이 이어져요. 그런데 우린 그런 것이 없어요. 학파가 없고 유파가 없어요. 뿌리가 없는 거지요. 우린 각자가 다 교주에요. 올해 우리 현대시조가 100년이 됐다고 하는데, 우리는 무얼 하고 있는가 이런 유파 하나도 확립 못하고, 이 사람은 이대로 저 사람은 저대로 다들 따로 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 좋은 시조, 탯거리가 있는 시조를 쓰는 것이 중요하고 그래야 괄시를 안 받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시조 창작과 관련해 한 말씀 덧붙여 주셨으면 합니다. ▲ 대학교수들이 시조를 한시처럼 기승전결에 갖다 붙이는데, 나는 아니라고 봐요. 시조는 3장이잖아요. 20여 년 전에 쓴 내 《시조창작법》에도 나오지만, 나는 시조를 ‘유(流), 곡(曲), 절(節), 해(解)’로 봐요. 태백산에 비가 내려 흘리고(流), 한 바퀴 감아 돌고(曲), 그 다음엔 가다 보면 낭떠러지 폭포를 만나요. 힘을 주게 되는 마디(節)지요. 폭포에 물이 떨어지고 나면 그냥 바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한 바퀴 돌아요. 소(沼)를 만들어 자정작용을 한 뒤 풀어서(解) 흘러가요. 한 번 흘리고 한 번 감아 돌고 한 번 마디 짓고 그 다음에 풀어내는 것, 시조 한 수를 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는 시조를 볼 때 시조만 생각하지 않고, 한국무용과 한국화, 판소리와 민요, 이런 것들을 합일해서 시조 창작에 연관 지어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조에 합류돼야 좋은 시조라고 생각해요. 시조에서는 종장이 가장 중요한데, 종장을 어떻게 풀까 나는 늘 고민을 합니다. 글씨로 말하면 길 도(道)자 밑에 책받침처럼 풀까, 음악으로 말하면 ‘평사낙안(平沙落雁)’, 달밤 백사장에 기러기가 내려앉듯이 자연스럽게 풀까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팍 끌어올리고 싶은 것은 그림으로 말하면 ‘동산월출(東山月出)’, 동산에 달이 돋듯이 뽑아 올리고, 글자로 말할 때 ‘주마축지(走馬蹴地)’, 달리는 말이 뒷발로 땅을 세게 한 번 차듯이 할까. 그래야 속도가 붙어요. ‘경조탁사(驚鳥琢蛇)’, 불시에 뱀이 나타나 참새를 잡아먹으려 할 때 너무 놀란 참새가 제 죽을 줄 모르고 뱀 대가리를 쪼는 경지, 깜짝 놀라게 하는 방법이죠. 이처럼 시조의 종장을 어느 경지에다 어떻게 접목을 시킬까를 늘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 안에는 무용도 있어야 하고 회화도 들어가야 하고 음악도 있어야 해요. 문학이 이를 다 합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내재율이 있는 좋은 시조가 되는 겁니다. 최근에 〈한세상 이야기〉를 연작으로 5편 써봤어요. 그 첫째 작품이 이래요. “우리가 서로 손 놓고 헤어지는 그날 밤은 / 궁금한 일 있더라도 돌아보지 말일이다 / 자꾸만 뒤돌아보니 달도 따라 오는 거다.” 종장에 해학을 담아본 겁니다. 인생을 이야기 해본 거지요. 두 번째 작품을 볼까요. “귀뚜리 울음소리도 창가에만 그냥 두면 / 하늘에 올라가서 서로 별이 되는 건데 / 사람이 데리고 다니니 자꾸 울게 되는 거다.” 왜 끌고 다니냐, 관심을 안 가지면 되는 건데. 도교사상을 접목해본 겁니다. 다섯째 작품은 이래요. “텅 비워둔 고향하늘 울고 가는 저 기러기 / 제 새끼 밥 지어주려고 물 길으러 간다는데 / 내 밥은 안 지어주고 울 어머니 어디 갔나.” 구십 먹은 자식이 칠순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요. 좋은 시는 눈물이 바닥에 많이 깔려야 좋은 시가 되는 것 같아요. 처음 시조를 쓸 때는 단수로 시작하는데, 단수로는 몇 마디 못하니 연시조를 쓰게 돼요. 그런데 쓰다보면 그게 또 길게 느껴져 생략하고 생략하다 보면 다시 단수로 돌아와요. 단수로 시작해서 단수로 끝나는 게 시조예요. 사람들이 백수 선생은 왜 사설시조를 한 편도 안 쓰냐고 그래요. 그러면 나는 재주가 없어 못한다고 얼버무려요. 나는 단수 시조만 해도 할 말이 모자라요. ― 선생님의 시를 보면 시조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시조의 맛을 제대로 우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젊은 시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계실 것 같은데요. ▲ 앞 시대, 앞사람의 것 다 내던지지 말고, 그냥 엎질러 버리지 말고, 거기에 뿌리를 박고 더 좋고 새롭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본받아서 더 새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요즘 일부 시인들의 시를 보면 내 눈에는 문법도 안 맞는 게 많아요. “개를 몰고 나온 사람, 개가 몰고 나온 사람.” 토시 하나에도 의미가 이렇게 달라지잖아요. 토씨가 이렇게 중요한데, 다들 토씨를 함부로 써요. 토씨만 잘 써도 시조는 돼요. 그 다음은 시상을 잡는 방법인데, 진솔하면 돼요. 눈물이 있고 진실이면 되지, 시가 다른 것이 없어요. 시 100편이 일언이 폐지하고 사무사(思無邪)에요. 이 작품을 볼까요. 〈뻐꾸기 우는 날에〉라는 작품인데, “옛날 우리 어머니가 지성스레 약을 달이듯 / 뻐꾸기 울음소리가 진초록을 달이는 날 / 고향산 늘어진 하루 해 새까맣게 다 탑니다. // 강산에 묻고 온 세월, 세월 속에 묻은 사람 / 한사코 매달린 시름까지 묻었는데 / 가슴에 잦아든 생각은 묻을 땅이 없습니다. // 살만큼 살았는데 지칠 만큼 지쳤는데 / 오고갈 말 한마디 남기고 갈 눈물 한 점 / 어디다 뿌려야 합니까 묻어둬야 한답니까.” 시조를 너무 어렵게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속에 담는 이미지나 메타포는 진짜배기를 담더라도 국민문학이 되려면 너무 어렵게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쉬운 게 좋은 거예요. ― 선생님은 자유시와는 어떤 관계 속에서 시조를 창작하시는지요. ▲ 나는 가급적 자유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자유시도 잘된 건 다 시조를 닮았어요. 나는 자유시를 읽다 좋은 시를 만나면 그것을 시조로 개작해 보는 버릇이 있어요. 시조로 바꿔 보면 원래의 자유시보다 훨씬 좋을 때가 많아요. 1급 자유시인들의 작품이 대부분 그래요. 기독교 시를 써서 성공한 사람으론 김현승을 들 수 있는데,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시조로 재구성해 보니 멋진 작품이 돼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같아요. 리듬도 좋고 절로 춤이 나와요. 중요한 것은 시조가 자유시에 끌려가지 말고 작품으로 시조가 더 좋다는 걸 보여주면 돼요. 시조가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압축하고 응축하고 비약하고 끊고 하는 것에 훈련이 잘돼 있잖아요. 자유시인들은 언어 낭비가 심해 그렇게 못해요. 시조를 그런 자부심으로 쓰면 돼요. 내가 시조를 발표하면 자유시인들이 내 작품을 보고 꼭 자유시 같다며 가끔 전화를 해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선생님은 왜 평생 시조만 쓰냐고 그래요. 그러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이 한다.”고 되받아요. 당신이야말로 시조를 쓰지 왜 자유시만 쓰느냐고. ― 선생님의 문학세계에 대한 평가는 물론 후세들의 몫이겠지만, 선생님 스스로는 자신의 문학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정리는 뒷세상에 오는 사람들의 몫이지, 내가 얘기할 건 못돼요. 사람들은 나를 ‘국부’니, ‘인간문화재’니 별 호칭을 다 갖다 붙이는데, 그럴 때면 나는 우스개로 이렇게 받아요. 국부가 아니라 국밥이라고. 다들 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래도 굳이 소망을 이야기 하라 하면 욕심이지만, ‘7백년 시조문학을 완성한 사람.’ 이런 호칭 하나 나왔으면 참 고맙겠지요. 또 조운의 섬세함과 투박함, 초정의 조탁, 그리고 이호우의 호쾌, 이런 걸 다 통합한 것이 백수시조라는 평을 들었으면 해요. 누굴 닮은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합일돼서 하나로 모은 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거지요. 그 귀결점은 쉽게 쓰고 간절하게 쓰고 눈물겹게 쓰는 겁니다. 어제도 강의를 하다 질문이 나왔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인생은 하나의 미열을 앓는 것이다.’ 자고 나면 근심이 생기고, 가보고 싶은 곳도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생기고, 이렇게 미열을 앓는 것이 인생이라면 ‘예술은 그 통증이다.’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 통증에 눌려 죽으면 그 뿐이지만, 이 통증을 이기고 나면 그 다음엔 뭐가 오겠나. 아기를 낳은 산모처럼 기운이 쭉 빠진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환희지요. 그 환희는 어디로 접목이 되나. 허허벌판 같은 데 닿지요. 서양 말로는 그것을 고독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고독으론 표현이 모자라요. 나는 ‘허적(虛寂)’이라 불러요. 고독과 허망과 눈물과 분노도 되고, 탄식과 회한도 되고, 그것이 한 덩어리가 되는 빈 들판 같은 적막 하나 얻으려고 우리는 이 세상에 왔다, 인생의 보수는 그것밖에 없다, 예술가의 보수는 특히 그렇다, 그걸 얻으려고 이 세상에 왔는데, 우리 시인이 시를 써서 장관이 될 겁니까, 재벌이 될 겁니까. 누가 우리 보고 겁을 내나요. 그래도 시인에게 좋은 것은 해치려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게 시인의 특권이라고 봐요. 그렇게 살고 싶어요. ― 선생님은 60년 동안 시조를 써 오셨지만, 아쉬움도 많을 것 같은데요. ▲ 아쉬운 거 많지요. 아쉬운 것은 많은데, 나는 그것을 참는 버릇이 돼 있어요. 참는 데서 벌통에 꿀이 채이듯이 가슴속에 눈물이 채여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옥토를 가진 성주가 돼요. 그래서 참는 것이 나쁜 게 아니고, 부족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불교에선 제일 높은 경지를 지관(止觀)이라 하는데, 가다가 멎을 줄 아는 거지요. 이형기 시인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처럼 가다가 머물 줄 아는 사람, 가다가 설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다워요. 정치·경제는 내달리고 앞서가는 것이 1등이지만, 예술은 질주가 아니고 산책이잖아요. ― 시조를 쓰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인지요. ▲ 좌고우면 하지 말고, 시조에 왔으면 시조에 헌신하고 귀의하고 그 하늘 아래 살다가 죽을 각오해야 한다는 겁니다. 보다 순수해야 하는 거죠. 순수하면 어떤 것이 오나요. 우풍순조(雨風順調)해야 풍년이 들듯이, 그래야 우리 자신을 다듬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시 쓰는 데 오기 부리지 말고 그냥 평상심으로 쓰면 자연 좋은 작품이 나와요. 내가 제일이다 생각하지 말고. 나는 늘 그렇게 쓸려고 해요. 김천 집에 달으라고 어떤 분이 음색 좋은 풍경 한 좌를 선물해 줬어요. 어떤 날은 풍경과 하루 종일 놀곤 하는데, 그래서 〈풍경에게〉란 시를 써봤어요. “아무도 없는 고향 텅 비워둔 내 고향집 / 너랑 같이 내려가서 나랑 같이 살자하고 / 눈감은 멧새와 같은 풍경 한 좌를 사 들었다 // 너는 구원의 장수 밤하늘에 먹을 갈고 / 너는 영혼의 별빛 먼 성좌에 불붙이고 / 숙조여 꿈 깊은 밤이면 네 가슴에 잠들거라.” 숙조는 잠자러 들어오는 새를 말하지요. 나도 외로운 날이면 풍경 내 가슴에 들어가 잠들 테니 풍경 너도 내 가슴에 들어와 잠들라는 것이지요. 시조에서는 제일 마지막 수의 종장이 가장 중요해요. 시의 윗부분이 수석이라면 시조의 종장은 수석의 받침돌이에요. 아무리 명석이라도 받침대가 좋지 않으면 명석이 될 수 없어요. 이 받침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마지막 수의 종장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고 종장에서 위의 시를 딱 떠받쳐야 명시가 되는 거예요. ▲ 여러분과 앉으면 이야기가 끝이 없지요. 시조 연작을 쓸 때 보통 1, 2로 이어가는데, 나는 ‘품(品)’이라 쓸 때가 많아요. 품성 품자, 불교에선 경문을 품이라 하지요. 시인은 스스로 경을 쓰듯이 시를 써야 해요. 〈가을하늘 3품(品)〉이란 시를 볼까요. “사랑은 구만리 길, 이별도 구만리 길 / 만약 저 허공에 저 하늘이 없었다면 / 어디다 머리를 두고 나는 울 뻔 했는가.” 가족사랑, 자연사랑, 만물에 대한 사랑. 태어나서 이 조국에 90년을 살았는데, 가을하늘이 없었다면 통곡할 곳도 없을 뻔했다는 거지요. 시조는 이렇게 잘라야 돼요. 많은 말은 독자에게 남겨둬야 해요. 왜 시조가 안 좋습니까. 자유시형으로는 이렇게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이런 시를 쓸 수 없어요. 이렇게 나는 ‘1, 2, 3’이라 안하고 ‘1품, 2품’으로 써요. 시조는 경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종교를 가졌어요. ■ |
《유심》2006.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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