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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2004년도)

이원식 시인 2007. 11. 5. 00:29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  (*아래 '지난 해'는 2004년도임)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로 문태준(文泰俊·35·불교방송PD) 시인의 ‘가재미’가 선정됐습니다. 도서출판 작가(대표 손정순)가 시인·평론가 120명에게 지난해*문예지에 발표된 시 가운데 가장 좋은 작품을 선정해 달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입니다. 문 시인은 지난해에도 시 ‘맨발’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가재미’는 말기암 환자에 대한 기억속 장면들이 언어의 표면으로 서서히 인화되는 순간을 채록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색한 작품입니다. 두 눈이 한쪽에 몰려 붙어있는 가자미(‘가재미’는 경상도 사투리)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만을 응시하는 환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문 시인은 “어렸을적부터 고향(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마을에서 같이 살다가 작년에 돌아가신 큰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바탕이 됐다”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느라 (시 쓰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문인수 시인의 ‘꼭지’, 박형준 시인의 ‘춤’, 천양희 시인의 ‘어떤 일생’ 등도 많은 추천을 받았습니다만, 굳이 순위를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좋은 시 노트에 적어놓으시고 두고두고 보시면 좋겠지요. 친구나 연인에게 보내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름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현대시학’ 2004년 9월호)

 

 

꼭지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현대문학 7월호)

         

<시작노트>

 

꼭지. 눈물이 핑 돌도록 배고픈 이름이다. 딸 그만 낳게 해달라고, 제발 아들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빈, 부적처럼 갖다 붙인 이름이다. 넷이고, 다섯이고, 내리 딸만 낳은 집안의 막내딸 이름엔 이 ‘꼭지’가 많았다. 태어나 전혀 환영받지 못한 태생, ‘꼭지’들의 삶의 환경은 보릿고개, 초근목피 같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지독한 가난 그 자체였다.


지금은 아무도, 달동네에서도 ‘꼭지’를 낳지 않는다. 현재 나이 50대 중반 이하에선 아마도 딸, ‘꼭지’가 없을 것이다.


‘꼭지’들의 팔자가, 그 노후인들 풍성하게 활짝 열렸겠는지. 아버지 복 없는 년은 남편 복도 없고 결국 아들놈 덕도 못 본다는 속설, 그런 한탄이 우리네 늙은 딸들한텐 있다. 동사무소 가는 저 ‘꼭지 할매’는 젊어 한 평생 ‘주전자운전수’노릇을 했다. 저런 한의 꼭지, ‘꼭다리’, 끄트머리가 이 시대에 아직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다.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창작과비평, 겨울호)

 

 

 


 

어떤 일생

 

천양희

 

부판이라는 벌레가 있다는데 이 벌레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신생, 가을호)

 

 

 <시작노트>

 

사람의 일생에는 누구에게나 동터 오르는
여명기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일생도 있다
부판처럼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다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
인생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하지만
삶이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어떤 일생」을 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