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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와 좋은 시평 / 유종호

이원식 시인 2007. 11. 5. 00:30
좋은 시와 좋은 시평

유종호

   시의 조건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커다란 물음에서 적정성 있고 활용 가능한 반듯한 대답이 나오기는 매우 어렵다. 좋은 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일반론이 있다면 좋은 시가 제가끔 독자적인 방식으로 좋은 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김소월의 「초혼」,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지용의 「향수」,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는 각기 1920년대에 나온 우리 시의 수작들이다. 그러나 이 시편들의 공통분모를 찾아서 정의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또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오장환의 「The Last Train」, 이용악의 「풀벌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김광균의 「와사등」, 서정주의 「자화상」,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등은 1930년대에 발표된 수작 시편들이다. 역시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일람표를 작성하는 일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같은 사정은 한 시인의 작품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20세기 한국시인 가운데서 아마도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인은 김소월일 것이다. 보통 독자들이 막연히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통념에 가장 들어맞는 시편을 다수 보여준 시인이 김소월이다. 아마도 김소월을 통해 보통 독자들이 시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게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김소월의 경우 가령 「진달래꽃」 「가는 길」 「산유화」「엄마야 누나야」 「팔베개 노래」 「삭주 구성」 사이의 공통점도 사실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가 리듬에 대해서 매우 민감했으며 시편의 음률성에 많은 배려를 했다고 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다. 또 그의 이러한 성향이 우리 구비 전통에 대한 청각적 충실에서 유해하다는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산유화」가 어째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보다 좋은 시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겉보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우리 시를 두고도 그러한데 거기에다 동서고금의 무수한 시를 두고 좋은 시를 정의하는 것은 더욱이나 어렵다. 그리고 이럴 경우 제기되는 막연한 일반론은 실제 작품에 적용할 때 별 실효성이 없다. 지속적인 작품 향수를 통해서 좋은 시에 대한 인지 감각을 기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시평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시의 좋은 점을 인지하고 독자들에게도 그러한 인지 감각을 길러주는 종류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우리가 분명한 리트머스 종이를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러한 리트머스 종이를 마련하려는 기도가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수상쩍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구체적인 사례를 상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좋은 시평에 대한 음화적(陰畵的)인 접근이 혹시 좋은 시평에 대한 정의의 근사치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좋지 못한 시평의 성질을 열거함으로써 좋은 시평의 이상형을 역구성(逆構成)해볼 수 있겠다는 뜻이다. 가령 시작품과 무관한 평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상을 늘어놓는 글이 있다면 그 글은 결코 좋은 시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특정 작품의 텍스트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개인적 삽화나 전기적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면 그 역시 좋은 시평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작품에 대한 부대상황의 설명으로 비평을 대체하는 경향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것은 독자들의 시인에 대한 호사적(好事的) 호기심을 충족시켜 흥미 있게 읽힌다는 사정도 가세하여 만연하는 경향이 있다. 시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시 자체의 이해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심성향을 가지고 있다.

  발생적으로 보아 서정시는 노래에서 나왔다. 노랫말에서 나온 시가 언제나 최초의 형태나 성질을 고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격 변화나 형태 개변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본적인 성격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서정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 터이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는 지속성과 동일성을 인지하게 된다. 서정시에서 음률성이나 리듬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장르적인 특성을 유지해주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와 뜻의 조화로운 균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소리가 따라주지 않는 뜻은 산문으로 근접해 가고 뜻이 따라주지 않는 소리는 울림과 무게를 갖지 못한다. 서정시의 이상을 이렇게 소리와 뜻의 조화로운 균형에서 찾는다면 소리 쪽을 도외시하고 뜻에만 매달리는 접근 태도는 매우 편향적인 접근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언 위주로 시에 접근해 가는 것은 시에 대한 일면적 파악으로 끝날 공산이 커지게 마련이다. 시를 산문처럼 대하는 셈이다. 전언 위주의 접근법으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나는 시평은 따라서 좋은 비평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말이 뜻의 비중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20세기의 한국 시사(詩史)는 번역시나 번역 시형이 주류로 부상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920년대의 김소월, 한용운에서 세기말의 젊은 시인들에 이르는 시를 일괄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번역  시형 이란 공통성이다. 시조도 아니고 가사(歌辭)와도 다른 20세기 한국시가 형태상으로 「두시언해」와 가장 닮아 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번역시를 대할 때 우리는 원시(原詩)의 소리가 실종된 뜻과 마주치게 된다. 소리를 사상(捨象)하거나 괄호 속에 집어넣고 뜻 위주로 접근하니까 자연 전언에 대한 배타적 관심이 부지중에 강조된다. 소리는 도외시하고 "나는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 열중하고 그러한 버릇이 확대 재생산되어 오로지 뜻과 전언에 치중하는 시인이나 시평을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성향이 시평의 이상향은 못 될 것이다.

  훌륭한 시인들은 대개 고유의 독자적인 언어 구사를 실천하게 마련이다. 스타일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미숙한 시인들은 파생적(派生的)인 언어 구사에 익숙해 있는 경우가 많다. 편향된 접근법은 독자적인 언어 구사나 파생적인 언어 구사에 대해서 대체로 함구한다. 따라서 규격화된 상투적인 말씨나 표출에 대해서도 함구하기가 십상이다. 선행 시편과의 관계에 대해 함구하고 문학행위가 결국은 문학적인 대차(貸借)관계의 연쇄임을 소홀히 하는 것도 문제이다.

  시의 언어는 일탈의 언어요 통념 거부의 언어이기 때문에 문법적 교란과 통사법적 위반이 특징인 시도 많다. 사회의 거부는 시에서 문법과 통사법의 거부로 흔히 표현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의 가독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며 그러기 때문에 반복적인 읽기가 불가피해진다. 이 점에 시의 매력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불가해한 시를 일률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것에 아무런 회의를 표명하지 않고 난해한 부분의 해명과 해석 없이 변죽만 울리는 시평이 의외로 많다. 좋은 시평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부정적으로 거론한 국면이 반듯하게 역전되어 있는 시평이 좋은 시평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시가 그렇듯이 좋은 시평도 저마다 독자적인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이상형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