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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문학. 일본문학 가운데, 단가(短歌)라는 일정한 형식의 서정시로서 일본어의 특성읕 잘 표현하는 와카[和歌]가 일찍이 발달하였다. 와카는 본디 일본 고유의 구두(口頭)문예로 시작해, 일상생활 속에서 발달하였다. 또한 풍족한 자연조건하에서 생겨난 자연감정·미의식의 표현으로서 일본의 감성과 사유(思惟)의 표현양식으로 자리잡았다. 대표적 와카집 《만요슈[萬葉集]》의 만요와카는 《고킨슈[古今集]》를 비롯한 칙찬(勅撰) 와카집[和歌集]시대의 단가로 계승되었으며, 한시(漢詩)에 대한 야마토우타[倭歌]로 자각되어 천황신앙과 표리를 이루는 궁정문학으로서 이른바 <미야비[優美]> 문학의 전통을 형성했다. 또한 와카를 통하여, 10세기 이후 발달한 산문문학에 내면적 정취를 가져다 주었다. 11세기 초에 완성된 장편소설 《겐지[源氏]이야기》도 다채로운 와카문학을 창작방법론으로 하고 있다. 칙찬 와카집은 무로마치[室町]시대까지 21집이 편찬되었고, 그 준비과정에서 우타아와세[歌合;좌우로 나뉘어 와카를 읊어 우열을 가리는 놀이]와 가카이[歌會;와카를 짓는 모임]가 성행하여 많은 작가가 나왔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 본질적 의미가 많이 바뀌었으나, 이른바 자유풍영적(自由諷詠的)인 서정영탄(敍情詠嘆)의 형태는 계속 유지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 이후 전통적 와카는 배척되었고 근대에 이르러 단가의 문학적 가치도 쇠퇴하였으나 31음(音)의 정형(定型)은 계속 이어져 왔다. 단가와 함께 전해져 내려온 하이쿠[俳句;5·7·5의 3句 17音으로 되는 短型詩]도 와카를 모태로 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단시형(短詩型)은 와카의 전통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일본문학은 이러한 단시형의 토착적 문학을 생활 속에서 육성시켜 온 미의식이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문학 >>
문학의 발생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오랜 구송(口誦)기간을 거쳐 12세기 무렵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한자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문자시대를 맞게 되었다. 언어를 표기하게 된 것은 5세기 이후이고 표기에 익숙해진 것은 6세기 말로부터 7세기의 스이코[推古]천황시대로 보인다. 그 뒤 조메이[舒明] 천황 때부터 시작된 이른바 만요[萬葉]시대는 야마토[大和]지방을 중심으로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 중앙집권적 율령제(律令制)로 확립되었다. 《만요슈》는 이러한 시대상황을 표현한 서정시집으로서 초기 일본문학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나온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그리고 각 지역의 풍토기(風土記)는 국가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편찬되었는데, 장기간에 걸친 구송(口誦)문학의 형태가 담긴 문헌으로서 귀중하다. 여기에는 원시·고대문학 특유의 풍요로운 상상력과 감상이 내포되어 있다. 한시·한문은 고대국가를 건설한 귀족관료들의 전통문학으로서, 다음 시대의 칙찬 한시문집 성립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까지의 문학은 모두 한자로 씌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른바 만요가나[萬葉假名]도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어 일본어를 표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9세기 말에 이르러서 만요가나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 만들어진 히라가나[平假名]의 보급과 함께 문학의 역사는 한 시기를 구분짓게 되었다.
헤이안[平安]시대 헤이조쿄[平城京]에서 헤이안쿄[平安京]로의 천도는 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를 타개하고 율령정치를 강화, 재편하려는 조정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대륙문화의 활발한 이입으로 도성의 규모·제도·문물이 모두 당풍화(唐風化)되었다. 이 시대의 문학이 한시문(漢詩文)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초 《료운슈[凌雲集]》 《분카슈레이슈[文華秀麗集]》 《게이코쿠슈[經國集]》라는 칙찬 한시문집이 편찬되었다. 구카이[空海]의 시집 《쇼료슈[性靈集]》와 중국의 시학(詩學)을 발초(拔抄)하여 편성한 《분쿄히후론》 등도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와카는 민간인들 사이에서 구송되었으나, 9세기 말엽 이른바 롯카센[六歌仙]시대를 거쳐 궁정귀족 세계에도 보급되었다. 새로 창안된 가나문자[假名文字]의 보급과 관련되어 그것은 만요와카와는 색다른, 아름답고도 섬세한 귀족문학으로서 《고킨와카슈》을 비롯한 칙찬 와카집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가나문자의 보급은 차츰 복잡한 도시사회를 형성해가던 헤이안쿄의 현실과 어우러져 다양한 산문문학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10세기 중엽 이후에는 창작활동이 시작되어 여류문학시대가 열렸다. 후지와라 미치츠나[藤原道綱]의 어머니가 쓴 《가게로일기》를 시초로 하는 여류 일기와, 세이쇼나곤[淸少納言]의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이야기》 등은 일본문학사의 금자탑이다. 이들은 이후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 말기 문학으로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역사담과 설화문학이다. 역사담에는 편년체(編年體)의 《에이가[榮花]이야기》와 열전체(列傳體)의 《오카가미[大鏡]》가 있는데, 《오카가미》의 형식을 받아들여 《이마카가미[今鏡]》 이하의 이른바 카가미모노[鏡物]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설화문학에는 8세기에 나온 불교설화집 《니혼료이키[日本靈異記]》가 있는데, 그 계통을 잇는 《곤쟈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는 고대 말기의 사회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주목된다.
<< 중세문학 >>
정치사에서 말하는 가마쿠라[鎌倉]·남북조(南北朝)·무로마치 등의 시대에 성립된 문학을 중세문학으로 보고, 일반적으로 가마쿠라시대를 전기, 남북조·무로마치 두 시대를 후기로 본다. 전기의 주요 작가는 귀족·승려·은자(隱者) 등이며, 후기에는 무사(武士)·마치슈[町衆;도시내 유력자]가 추가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불교적 색채가 짙어 무상감(無常感)과 유현(幽玄)의 미의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가면서 종교적 색채는 줄어들었다.
전기:가마쿠라시대 이 시기에는 고토바인[後鳥羽院]·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를 중심으로 궁정와카가 매우 활기를 띠었고,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가 편찬되었다. 이로써 와카에 눈을 뜬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實朝]가 《긴카이와카슈[金槐和歌集]》를 남긴 외에 가모노 조메이[鴨長明]의 《호조키[方丈記]》, 불교설화집 《홋신슈[發心集]》 등이 편찬되었다. 또한 왕조문학를 동경하던 미나모토노 아키카네[源顯兼]가 《고지단[古事談]》을 편찬했다. 이 무렵에는 와카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중세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는데 지엔[慈圓]의 사론(史論) 《우관초[愚管抄;神武天皇으로부터 順德天皇까지의 역사를 설명한 것]》, 병란의 군기록물(軍記錄物)인 《죠쿠키[承久記]》 등 역사문학과, 《가이도키[海道記]》 《도칸기행[東關紀行]》 《이자요이[十六夜]일기》 등의 기행문학이 생겨났다. 13세기 후반에는 헤이안시대에 만든 이야기와 그 이후의 이른바 의고(擬古) 이야기를 본떠 《후요와카슈[風葉和歌集]》 《짓킨쇼[十訓抄]》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 등이 완성되었다. 한편 1234년 무렵 편찬한 《신초쿠센와카슈[新勅撰和歌集]》로부터 1439년 《신쇼쿠고킨와카슈[新續古今和歌集]》까지, 이른바 <13대집(代集)>이라고 하는 많은 와카집이 나왔다. 자연에 대한 파악과 심리표현·사상성 등의 점에서 특색 있는 것은 교고쿠 다메카네[京極爲兼]가 편찬한 《교쿠요와카슈[玉葉和歌集]》, 남북조시대 북조의 고곤인[光嚴院]이 편찬한 《후가와카슈[風雅和歌集]》이다. 가마쿠라시대 말에는 가인(歌人) 겐코[兼好]가 인생의 무상함과 처세철학을 《쓰레즈레구사[徒然草]》를 통해서 이야기하였다. 무사사회에서는 소카[早歌;宴曲] 가 사랑받았다.
후기:남북조∼무로마치시대 남북조의 동란은 사회를 피폐시키고 인심을 황폐하게 만들었으나, 문학에 있어서는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전란 초기에는 남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에 의해 사론(史論)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가 저술되었고, 가마쿠라시대를 회고하는 궁정 역사이야기 《마스카가미[增鏡]》가 나왔다. 그리고 동란이 끝나기 전 그 경위를 서술한 《다이헤이키[太平記]》가 나왔다. 또한 가마쿠라시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렌가[連歌]는 남북조시대에 최초의 렌가집 《쓰쿠바슈》가, 무로마치시대에 《신찬(新撰) 쓰쿠바슈》가 편찬됨으로써 와카를 대신해 중세의 대표적인 시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남북조 동란 이후 1467년에 일어난 <오닌[應仁]의 난> 이후 전국난세(戰國亂世)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소가[曾我]이야기》 《기케이키[義經記]》 등은 무로마치시대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다룬 뛰어난 작품이다. 이 시기에는 귀족문화인 구게문화[公家文化]가 소멸하고 서민문화가 발흥하였다. 흔히 오토기조시[御伽草子;통속단편소설]라고 불리는 단편 모노가타리조시[物語草子]도 전기의 의고(擬古)이야기를 대신하여 이 시기에 많이 생겨났다. 전국시대 이후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로서 우신[有心]의 렌가에서 나누어져 나온 하이카이[俳諧]의 렌가나 우염(優艶)한 와카에 대한 교카[狂歌;제재·착상·용어에 구애받지 않는 익살·해학에 찬 短歌] 등이 사랑을 받았다. 《이누쓰쿠바슈[犬筑波集;俳諧 連歌選集]》를 편찬한 소칸[宗鑑]이나 《모리타케센쿠[守武千句]》의 아라키다 모리타게[荒木田守武] 등이 하이카이 작가로서, 또한 유초로[雄長老]가 교카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다. 전기의 작가들과는 달리 현실 긍정 정신이 나타났다. 중세 후기 고잔[五山]의 선승(禪僧)들의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하는 고잔문학은 가마쿠라시대로 거술러 올라갈 수 있으나, 남북조에서 무로마치시대에 걸쳐 기도슈신[義堂周信]·젯카이추신[絶海中津] 등 여러 시승(詩僧)이 나왔다. 한편 1549년 그리스도교가 전래하여 선교사업의 하나로 복음서·이솝우화 등의 번역과 일본고전의 구어역(口語譯)이 이루어져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기존의 문학에도 영향을 끼쳐 근세 출판문화의 선구가 되었다.
<< 근세문학 >>
근세문학의 특색 근세문학은 16세기 말 아즈치모모야마시대를 지나 도쿠가와 바쿠한[德川幕藩]체제의 성립·붕괴에 이르는 약 2세기 반 동안의 에도[江戶]시대 문학을 말한다. 이 시대에는 ① 문학의 사상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중기에 이르러 반(反)유교적·반불교적인 국학(國學)이 성립되고, 특히 근세 와카·가론(歌論)의 형성이 촉진되었고 ② 사농공상(士農工商) 세습제와 더불어 신분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남녀간의 교제가 자유롭지 않아, 슬픈 사랑이야기가 문학에 반영되었으며 ③ 화폐제도가 생겨 돈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문학이 생겨났고 ④ 직업작가가 등장하였다.
가[雅]문학과 조쿠[俗]문학 근세문학은 크게 가[雅]문학(제 1 문학)과 조쿠[俗]문학(제 2 문학)으로 나뉜다. 가문학은 전통적인 와카·와분[和文]·한시문(漢詩文) 등으로, 지배계급·특권계급의 문학이었다. 그러나 겐로쿠[元祿;1688∼1704] 무렵부터 서민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문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특히 와카·가론은 19세기에 들어 근대적 체제가 형성되었다. 조쿠문학은 근세에 들어와 서민들에 의해 제작된 문학으로, 하이카이·자츠바이[雜俳]·교카·교시[狂詩] 등의 시, 우키요조시[浮世草子;화류계를 중심으로 한 소설]·구사조시[草雙紙;삽화가 든 대중소설]·샤레본[灑落本;화류계놀이와 익살을 묘사한 풍속소설]·고케이본[滑稽本;익살스런 통속소설]·닌조본[人情本;서민의 애정생활을 그린 풍속소설]·요미혼[讀本;흥미로운 읽을거리 책]·하나시본 등의 소설, 조루리[淨瑠璃]·가부키[歌舞伎] 등의 연극, 그리고 근세가요와 고샤쿠[講釋]·라쿠고[落語] 등의 설경(舌耕)문예가 여기에 더해져 서민문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가미가타[上方]에서 에도로 근세문학의 중심지는 18세기 중엽까지 가미가타(교토 부근 및 關西地方)였으나, 그 뒤 에도로 옮겨갔다. 17세기 말엽 겐로쿠문예부흥기를 정점으로 하는 가미가타문학은 출판업자의 상업주의에 의한 오락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천편일률적인 작품으로, 독자에게 흥미를 주지 못했다. 그리고 서민적 예능인 조루리도 선행작품의 재탕이 빈번하여 쇠퇴하게 되었다.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이전의 산문작품은 가나조시[假名草子], 사이카쿠 이후의 소설은 우키요조시[浮世草子] 등으로, 가미가타에서는 일괄적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에도의 소설은 장르가 다양했다. 이는 가문학을 하는 지식계급이 조쿠문학에도 참가했고, 가미가타와 달리 출판자본이 적었고 작자가 새로운 문예이념을 갖고 등장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또한 경학(經學)과 문학을 포괄하는 유학이 정치의 지도원리였던 까닭에, 겐로쿠기까지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의 고학파(古學派)가 교토에 터전을 두고는 있었으나 재빨리 에도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 반유학적인 국학도 시모코 베초류[下河邊長流]와 승려 케이추[契沖] 등을 통해 가미가타에서 계속 연구되었으나, 1716년부터 에도로 옮김에 따라 한문시의 중심도 에도로 옮겨갔다.
<< 근대문학 >>
창출기:메이지시대 근대문학이 <근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형태를 갖추게 된것은 1880년대 후반이라 할 수 있다. 그 전기를 마련한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나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의 문학론,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무희(舞姬)》가 발표된 것은 1887년 전후의 일이다. 쓰보우치 쇼요의 《쇼세쓰신즈이[小說神髓]》를 보면, 에도시대의 권선징악적 이야기를 부정(否定)하고 유형적(類型的) 인간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그려내는 사실주의 사고방식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모리 오가이의 《무희》는 독일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유럽식 문맥과 전통적 가문체[雅文體]의 문맥을 융합, 정합성(整合性)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에도시대 희작자(戱作者:통속문학 작가)의 본질을 답습하면서 신시대 개화(開化)풍속에 관심을 기울인 가나가키 로분[假名垣魯文] 일파, 유럽문학의 일본적 번역에 힘쓴 사람들, 자유민권운동과 연관있는 야노 류케이[矢野龍溪]·도카이 산시[東海散士] 등의 정치소설, 그리고 폭넓은 언론활동에 의해 전국민적으로 읽혀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유》, 나루시마 류호쿠[成島柳北] 등의 <반근대적(反近代的) 경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자키 고요[尾岐紅葉] 등의 <겐유샤[硯友社]>는 《가라쿠타문고[我樂多文庫]》를 창간하여 l890년대 문단의 중추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고다 로한[幸田露伴]도 이 시대에 활약하여 <고로쇼오[紅露逍鷗]시대>를 낳았다. 그 밖에 근세 낭만주의외 선구자 기타무라 토코쿠[北村透谷]는 자유민권운동에 참가했다가 문학의 길을 걸었는데, 그는 <인생에 관계되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라고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의 공리주의적 문학관을 비판했으며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등과 동인잡지 《문학계(文學界)》를 창간했다. 《문학계》 출신 히구치 이치요의 《니고리에[濁江]》 등은 근대단편소설의 선구적 의미를 지닌다. 《두견이[不如歸]》를 쓴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는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도쿄 교외에서 반농(半農) 생활을 하였고, 구니키다 돗포[國木田獨步]는 《무사시노[武藏野]》에서 청신한 자연을 표현하는 등 단편소설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다. 이러한 근대 단편소설의 계보는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에게로 이어졌다. 《문학계》의 뒤를 계승한 요사노 테쓰칸[與謝野鐵幹]과 아키코[晶子]의 《명성(明星)》은 <신시샤[新詩社]>라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아키코의 《흐트러진 머리칼》뿐 아니라, 우에다 빈[上田敏]도, 《해조음(海潮音)》의 기조가 되는 번역시를 기고하여 시·번역·소설·회화(繪畵) 등 장르를 초월한 메이지시대 낭만주의의 광장이 되었다. 쓰치이 반스이[土井晩翠]와 《문고(文庫)》에 의존한 가와이 스이메이[河井醉茗]·요코세 야우[橫瀨夜雨]·스스키다 규킨[薄田泣菫]·간바라 아리아케[蒲原有明] 등의 시도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는 단가·하이쿠의 혁신과 사생(寫生)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확립기:메이지 말∼다이쇼 시대 1906년에 창간된 《와세다문학[早稻田文學]》은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를 비롯하여 시마자키 도손·도쿠다 슈세이[德田秋聲]·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이와노 호메이[岩野泡鳴] 등 소설가와 평론가가 함께 참여했다. 낭만주의를 벗어난 일본적 자연주의문학은, 현실을 직시하고 회색(灰色) 인생관을 피력하며 무이상(無理想)·무해결·무기교의 문학적 태도를 보였다. 대표작으로 《시골선생》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에 맞서 등장한 것이 《미타(三田)문학》과 《백화(白樺)》로 대표되는 다이쇼시대의 문학이다. 다이쇼시대 문학은 스스로의 자질·감정·생리·육체 전체에 걸친 실감을 토대로 움트기 시작했다. 이들 <도쿄 야마노테의 청년>이라 불린 세대의 사람들은 자기 육체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대담한 에고(ego)에 의한 각양각색의 개성 신장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백화》의 존재는 정체상태에 빠진 문단에 산뜻한 활력소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나가이 가후[永井荷風]·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등 탐미주의자들은 시대와 상관없이 내면의 모티프에 따른 작가활동을 전개하여 <반(反)근대> 자세로 일관했다. 런던에서 귀국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산지로[三四郞》 《마음》 《명암(明暗)》 등을 발표, 근대 최고의 문학가로서 메이지 시대 근대화에 부착된 피상적 요소를 제거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죽은 1916년 전후는, 모리 오가이의 역사소설과 메이지 이래의 자연주의 학가, <백화> 사람들, 탐미파 사람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기쿠치 간[菊池寬] 등 다이쇼시대 작가가 모두 함께 활약하여 근대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1인칭소설을 핵심으로 하는 순수문학의식이 왕성해진 시기이기도 하며, 소설가와 시가(詩歌)의 관계자가 상호 교류함으로써 소설과 시가의 밀월시대가 출현했다. 한편 다이쇼시대 작가 대부분은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서 유럽연극 도입과 함께 소설·희곡을 활발히 발표했다.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內薰] 등의 자유극장과 시마무라 호게쓰의 예술좌(藝術座) 등의 결성에 이어 쓰키지[築地]소극장이 탄생했다.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는 《붉은새》를 창간했고,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사이조 야소[西條八十]·노구치 우조[野口雨情] 등은 애창동요를 써서 근대아동문학의 시초가 되었다. 사회주의문학은 대역사건(大逆事件) 이후 암흑기를 맞았으나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아라하타 간손[荒畑寒村] 등은 《근대사상》,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는 《수세미외 꽃》, 도키 아이카[土岐哀果]는 《생활과 예술》을 창간함으로써 민중시파(民衆詩派)와 노동문학이 발흥되었고, 《씨뿌리는 사람》이 창간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새벽을 맞이했다.
전환기:쇼와[昭和] 전기(前期) 쇼와 문학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뒤 《문예전선(文藝戰線)》과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등이 예술에 의한 개혁을 목표로 1924년 《문예시대(文藝時代)》를 창간한 뒤부터 시작된다. 다이쇼문학 쪽에서 보면, 27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이 시대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문학과 신감각파는 기성문단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는 방법을 같이 하면서도, 교류와 배반이 되풀이되어 프롤레타리아문학·신감각파·기성문단이 정립(鼎立)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 한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계속된 탄압으로 전향현상이 일어났고, 신감각파는 기성문단에 흡수되었다. 한편 순수문학에 비하여 대중문학은 저널리즘의 확대화 속에서 비대해져, 나카자토 가이잔[中里介山]이 《다이보사츠도게[大菩薩峠]》,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郎]가 《쿠라마텐구[鞍馬男天狗]》,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가 《젊은 사람》 등 명작을 남겼다. 요코미쓰 리이치는 쇼와문학의 개척자로서 《상하이[上海]》 《기계》 등을 발표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즈[伊豆]의 무희》를 거쳐 《설국(雪國)》을 완성했다. 33년에는 <문예부흥기>를 맞아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많은 작가들이 전향했다.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등은 《시골집》 등 뛰어난 작품을 썼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나가이 가후·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는 시대의 동향에 영합하지 않고 작품을 썼으며, 시마자키 도손은 《동트기 전》, 시가 나오야는 《암야행로(暗夜行路)》를, 도쿠다 슈세이는 《가장인물(假裝人物)》 등을 발표했다. 쇼와시대 작가들은 대부분 동인잡지에서 출발했으며, 오자키 가즈오[尾岐一雄]·니와 후미오[丹羽文雄]·후나하시 세이이치[舟橋聖一]·이시카와 다쓰조[石川達三]·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 등이 10년간의 고난 끝에 1930년대 유행작가로 활약했다. 쇼와시대 문학은 또한 요절한 소수파 시인을 많이 낳았고, 전쟁문학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작가도 있었으나 묵묵히 전후문학의 토대 구축에 힘쓴 작가도 많았다.
<< 현대문학 >>
제 2 차세계대전 이후 문학은 종전(終戰)·점령·매스컴의 거대화·고도성장 등 정치·경제·사회의 큰 변화 속에서 20세기 중엽 이후 세계문학의 추세를 반영하면서 전쟁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흐름을 크게 보면, 전후로부터 70년까지의 문학은, 전후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와 그 비판세력으로 나타나는 반근대주의적 경향이라는 두 이념의 교체와 중층(重層)의 역사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두 이념의 대립은 어디까지나 소설을 중심으로 한 문학이라는 영역 안에서의 일이었다. 그런데 70년 무렵 이후 종래의 소설 또는 문학은 급속히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순수문학이 팔리지 않는다는 현상적 측면만이 아니었다. 즉 종전처럼 문학을 문학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언어의 짜임새로서 사회적·역사적인 시야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현상이기도 하다. 전후문학의 흐름을 더듬어 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1940년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민주화의 물결은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렸다. 당시 무뢰파(無賴派)라고 불린 이시카와 준[石川淳]·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다자이 오사무[太宰治]·오다 사쿠노스케[織田作之助] 등의 파멸적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斜陽)》 등은 강한 충격을 주었다. 새로운 문학이념 형성면에서는 히라노 겐[平野謙]·아라 마사히토[荒正人]·혼다 슈고[本多秋五] 등 《근대문학》파 평론가들이 수행한 역할이 크다. 한편, 나카노 시게하루·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구라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등 구(舊)프롤레타리아 문학가들은 《신일본문학》에 의존하면서 민주주의 문학운동을 추진했다. 이들 둘 사이에 일어난 <정치와 문학> 논쟁은 종래의 순수문학을 정치 또는 매스컴으로부터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 하는 발상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러한 문학 또는 자아를 포착하는 방법이 전후문단의 지배적 이념이 되었다. 창작면에서는 전후파작가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관념적인 소설이 등장했다. 노마 히로시[野間宏]의 《어두운 그림》은 그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1인칭소설이 문단의 주목을 받는 한편, 니와 후미오·다무라 다이지로[田村泰次郞]·이시사카 요지로[石坂洋次郎] 등의 풍속소설·중간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1951년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한 뒤, 문학은 전후 최초로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민주주의 문학운동의 내부 분열과 국민문학 논쟁이었다. <채털리부인의 사랑> 재판(1950∼57) 등 문학재판의 과정에서도 점령정책전환의 영향은 확인되었다. 53년 이후 전후파의 관념성에 대하여 일상성을 중시하는 <제 3 의 신인>이라는 그룹이 등장했다. 한편 《태양의 계절》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와 이 밖에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사육(飼育)》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등이 전후세대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다. 50년대는 매스컴의 발달로 인하여 작가의 탤런트화·문학의 흥행화가 눈에 띄기 시작하여 문단의 붕괴가 거론되었다. 또한 전후파작가의 퇴조와 분화 속에서 《금각사(金閣寺)》 이후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고, 이에 호응하듯 다니자키 준이치로·무로우 사이세이[室生犀星]·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의 유미적(唯美的)인 노인문학이 각광을 받았다. 특히 40년대에 장편 《세설(細雪)》을 발표한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열쇠》를 발표, 인기를 끌었다. 50년대 중엽에는 여류작가의 활동도 눈에 띄었으며, 소노 아야코[曾野綾子]와 아리요시 사와코[有吉佐和子]가 데뷔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신문소설·역사소설,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미나카미 쓰토무[水上勉] 등의 사회파 추리소설은 기존의 문단문학을 위협했다.
1960년대 오에 겐자부로·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巳]·이노우에 미쓰하루[井上光晴]·오다 마코토[小田實] 등 전후파를 계승한 작가들은 60년 안보투쟁(安保鬪爭)의 경험을 통해 전공투(全共鬪;일본 대학생의 반체제·무당파 파괴운동) 운동에도 부분적으로 관여하면서 권력과 대치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70년을 전후하여 잇따라 대작을 발표했다. 그러나 4부작 《풍요의 바다(1965∼71)》를 완성하고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의 충격적인 행동이 있었는데, 이는 경제성장과 함께 개인중심주의로 타락한 전후시대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가스자살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 밖에 반(反)리얼리즘소설로 주목을 끈 《모래 여자》의 아베 고보[宏倍公房], 《용마(龍馬)는 가다》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마루야 사이이치[丸谷才一]·쓰지 구니오·기타 모리오[北杜夫] 등의 장편, 구라하시 유미코[倉橋由美子]·고노 다에코[河野多惠子] 등의 청춘소설, 야케아토야미이치[燒跡闇市]파의 노사카 아키유키[野坂昭如] 등의 활동이 60년대 문학을 특징지웠다.
1970·80년대 정치·경제의 여건 변화로 약 20년 동안의 고도성장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69년 전공투(全共鬪)운동이 끝났는데도 도시화의 진전, 매스컴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다양화로 인하여 문예출판, 특히 순수문학의 판매부진이 심각해졌다. 문학적 입장이 같은 작가들간의 교류가 어려운 상태에서 문학의 다양화가 계속되어 특징지을 수 있는 사조가 없었다. 전후 세대로서 토속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를 개척한 나카가미 겐지[中上健次], 이와는 달리 도시적이고 가벼운 문체에 게임과 같은 이야기구성을 특색으로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등이 주목받는 작가로 등장했다. 여류신인으로는 쓰시마 유코[津島佑子]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한편 이시카와 준·후지에 시즈오[藤枝靜男]·와다 요시에[和田芳惠]·노구치 후지오[野口富士男] 등 고령작가의 활동도 활발하였고, 하니야 유타카·나카무라 신이치로·홋타 요시에 등 전후파의 활동도 괄목할 만하다. 전후파의 다음 세대인 오에 겐자부로는 현대문학의 거두로 존재하고 있고, 쓰쓰이 야스타카[筒井康隆] 등의 패러디(parody)나 추리소설 또는 SF에 의한 충격도 볼 수 있다.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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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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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야스마로[太安麻呂] 《고사기(古事記)》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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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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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에 《풍토기(風土記)》 편찬 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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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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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네리 친왕[舍人親王] 등,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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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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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집(漢詩集) 《가이후소(懷風藻)》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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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 |
경 |
《만요슈[萬葉集]》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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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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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假名]문자 발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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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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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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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도리[竹取]이야기》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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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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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 쓰라유키[紀貫之] 등,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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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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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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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미치쓰나[藤原道綱] 모친 《가게로일기》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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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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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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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쇼 나곤[淸少納言] 《마쿠라노소시[枕草子]》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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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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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겐지[源氏]이야기》 일부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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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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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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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가[榮花]이야기》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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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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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가미[大鏡]》 《곤자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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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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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 등,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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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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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조메이[鴨長明] 《호조키[方丈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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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
경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實朝] 《긴카이와카슈[金槐和歌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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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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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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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케[平家]이야기》 성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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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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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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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겐코[吉田兼好] 《쓰레즈레구사[徒然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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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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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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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헤이키[太平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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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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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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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소칸[山崎宗鑑] 《이누쓰쿠바슈[犬筑波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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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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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고쇼쿠이치다이오토코[好色一代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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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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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 바쇼[松尾芭蕉] 《사루미노[猿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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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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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歌舞伎]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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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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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카마쓰몬 자에몬[近松門左衛門] 《소네자키의 심중[曾根崎心中]》 초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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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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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이즈모[竹田出雲] 등, 《가나테혼추신구라[假名手本忠臣藏]》 초연. 조루리[淨留璃] 전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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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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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고사기전(古事記傳)》 착수(~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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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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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부손 《신화적(新花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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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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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나의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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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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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학문의 권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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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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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 《소설신수(小說神髓)》 《당세서생기질(當世書生氣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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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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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 《부운(浮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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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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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森鷗外] 《무희(舞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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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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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 로한[幸田露件] 《오중탑(五重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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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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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무라 토코쿠[北村透谷] 《내부생명론》. 《문학계》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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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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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치 이치요 《키재기》 《니고리에[獨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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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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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키 고요[尾崎紅葉] 《금색야차(金色夜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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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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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키다 돗보[國木田獨步] 《무사시노[武藏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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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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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교카[泉鏡花] 《고야성(高野聖)》.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 《자연과 인생》, 《명성(明星)》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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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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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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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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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파계(破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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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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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조》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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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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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潮] 《어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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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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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시골 선생》. 나가이 카후[永井荷風] 《미국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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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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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白樺)》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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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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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마음》.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도정(道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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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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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라쇼몽[羅生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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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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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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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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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오야[志賀直哉] 《기노자키[城崎]에서》 《화해(和解)》. 기쿠치 간[菊池寬] 《아버지 돌아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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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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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새》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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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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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郞] 《어느 여자》.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우정(友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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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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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춘추》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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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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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시대》 창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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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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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이즈[伊豆]의 무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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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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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 《기계(機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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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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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48)》.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사소설론(私小說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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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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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與一] 《하늘의 박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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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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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谷岐潤一郞] 《세설(細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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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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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 히로시[野間宏] 《어두운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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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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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린조[椎名麟三] 《심야의 주연(酒宴)》.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사양(斜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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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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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산의 소리(~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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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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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고보[安部公房] 《벽(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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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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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 아야코[曾野綾子] 《멀리서 온 손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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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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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열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금각사(金閣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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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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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죽은 자의 사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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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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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사육》, 이토 세이[伊藤整] 《범람(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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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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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고보[安部公房] 《모래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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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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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신이치로[中村眞一郞] 《공중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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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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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개인적 체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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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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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침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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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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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만연원년의 풋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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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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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노벨문학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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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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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코 다케시[開高健] 《여름의 암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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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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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俊]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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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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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새 사람이여 자각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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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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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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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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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노벨문학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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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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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구니오[逑邦生] 《사이교의 멋진 인생》, 요시하라 사치코[吉原辛子] 《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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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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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마사오 《하이카이 쓰지 시집》, 다나카 스미에 《남편 다루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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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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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 《가족 시네마》, 시부사와 고스케 《영원한 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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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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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슈[藤澤周]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전 0시》, 하나무라 만게쓰[花村万月] 《게르마늄의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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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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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파크라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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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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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이라[石田衣良] 《4TEEN》 요시무라 만이치[吉村萬壹] 《선충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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