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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박용래

이원식 시인 2009. 6. 13. 00:00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 박용래, 그림 최종태(조각가, 화가, 서울대 교수)

 

 1977년 초겨울, 대전 근교에서 (박용래 시인)

 

   보리밭 호밀밭은 사람들이 갈지만 보리 이삭 호밀 이삭은

누가 키우나, 심심산천의 뻐꾸기가 키우고.

   호박씨 감자눈은 사람들이 묻지만 산 너머 풀바람은 누가 물

어 오나, 심심산천의 뻐꾸기가 물어 오고.

   논물 봇물은 사람들이 대지만 부엌에 묻은 물항아리 누구 그

득 채우나, 심심산천의 뻐꾸기가 채우고.

   천연두 수두는 누가 내키나, 심심 산천의 뻐꾸기가 내키고.

   장날의 징소리는 사람이 알리나, 심심 산천의 뻐꾸기가 알리고.

   뻐꾸기 울음따라 또 5리를 간다.

                                                      -「나루터」에서

 

     감    새

 

  감나무에서만 살아서 감새인가. 주렁주렁 익는 감알만 쪼아서 감새인가. 10년 전, 20년 전의 초가집은 기와

집으로 변하고 기와집은 또한 슬라브 지붕으로 변하여, 이제 감새의 주소를 찾을 길 막연하다만 그래도 감새

는 오늘도 그림 없는 액자에 걸려 사뭇 파닥거리고 있다.

 

   오오직 한 번만의 인생이라지만 두 번 인생을 살고 싶다. 허

락된다면 세 번, 다섯 번......

   어제도 취중이었기에 오늘도 취중이기에.

   어제도 본의 아니었기에 오늘도 본의 아니기에......

   순간이라도 본의대로 한 번을 살아 보고 싶다.

   들국화를 보며, 들길을 가며.

                                           -「詩를 위한 팡세」에서

 

    Q형, 까치가 우짖고 있습니다, 봄을 물고.

    도시의 봄은 빌딩숲 사이 아코디언 소리로 온다고 어느

시인은 읊조렸지만 아무래도 시골의 봄은 까치가 물고 오는

듯합니다. 나뭇가지 물고 오듯이. 먼 산은 아니어도 잔설의

여운이 선연한데 Q형, 한 쌍의 까치가 머리맡에서 우짖고

있습니다. Q형,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슴아슴 부활의

등피를 들고, 카츄샤의 봄이. 봄에도 오는 시베리아의 눈.

그 눈길을 밟고 하염없이 가는 유형(流刑)의 카츄샤, 뒷모

습에 나불대던 삼각 스카프.

                                            -「카츄샤의 봄」에서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九節草」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