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ry/내 작품평·해설

김은령「융화세상(融和世上)을 꿈꾸는 진언(眞言)《시조세계》2009.겨울호

이원식 시인 2009. 12. 19. 00:01

김은령,「융화세상(融和世上)을 꿈꾸는 진언(眞言)」-이원식 시인론

                                  《시조세계》2009.겨울호(2010년 시조세계를 빛낼 신진 시인: pp.138-144)

 

                                                              

                                 융화세상(融和世上)을 꿈꾸는 진언(眞言)



                                                                                                                 김 은 령(시인)


  시조의 미학을 엄격한 정형률 속에 내재된 첨단의 시어로, 개인의 서정을 넘어 대상(시대)의 초상을 그려내는 감필법(減筆法)적 전언이라 요구한다면 이원식의 작품은 드물게 이에 합당하다 하겠다.

정형의 가장 기본률이라 할 수 있는 ‘단시조’를 고집하는 그의 작품성향은 그간에 선보인 두 권의 시집(『누렁이 마음』모아드림, 2007. 『리트머스 고양이』작가, 2009)에서도 확인 되었던 바, ‘시조’라는 양식이 견지하는 선험적인 골격인 ‘정형’을 섬세하게 지키고 있음은 물론, 압축과 긴장의 감각 또한 능란하게 구현함으로써 시조양식이 요구하는 조화로운 형식과 심층적 전언을 견고하게 담아내고 있다.

안정된, 품격이 갖추어진 작법(作法)이 돋보이는 시편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불교적 상상력을 기조로 둔 구도(求道)의 행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 쓰기는 이 시대에 화두로 던져지기도 한다. 꽃, 새, 거미, 지렁이 등이 등장하는 그의 작품에는 인간 중심의 우주 질서에서는 결코 힘을 가지지 못한, 작고 연약한, 그럼에도 우주를 짜 맞추는 ‘판’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들을 통해 각(覺)을 이루고자 하는 불교적 사상이 깊이 깔려 있다. 시인의 그런 사고(불교적 사상)는 ‘빈 것과 가득함’ ‘추락과 비상’ ‘과거와 미래’ ‘떠남과 돌아 옴’ ‘천상과 지상’ ‘이승과 저승’ 등, 서로 상이(相異)한, 대립 되는 도저히 융화 될 수 없는 이치가 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통찰하는 불이(不二) 사상에 다다른다.



          겨울 산

          텅 빈 암자

          불영(佛影)에 비친

          환한 미소


          새들이

          물어 오는

          햇살 한 줌

          권하고 있다


          칠금빛

          소담한 공양(供養)

          마음 속

          업(業) 한 그릇


                 -따뜻한 절밥」전문



  가진 것을 다 내려놓은 겨울 산, 그 산에 있는 암자는 인기척 없이 텅 비어 있다. 보여 지는 풍경 그대로라면 분명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텅 빔’ 속에서 부처의 미소를 찾아낸다. 뿐만 아니라 암자에 내려 앉아 있는 햇살 한 자락(줌) 까지도 겨울(빈) 산에 깃을 내리고 있는 새들의 ‘노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연 만물 어느 하나, 예를 들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햇빛조차도 누군가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밥(따뜻한 절밥)이 된다고 한다. 그에 더해 그 햇빛 한 줌이 칠금빛 소담한 ‘공양(供養)’이며 그것은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할 ‘업(業)’ 한 그릇이라고 한다.

자연(햇빛)이 곧 먹이(따뜻한 밥)임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그 자연과 그것을 누리는 주체들은 서로 빈 것을 가득 채우는, 또한 언제나 텅 비어 있는, ‘텅 빈 것과 가득 참’이 둘이 아님은 통찰한다. 그런 시인의 통찰 적 시선은 다음 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꽃잎 진 그 자리를

          돌아본 적 있던가

 

          찾는 이 하나 없어도

          손 흔드는 나뭇가지


          한 조각 하늘을 물고

          내려앉는

          새,

          새들



                 -「아름다운 이후(以後)」전문



  ‘꽃잎 진 그 자리를/ 돌아본 적 있던가’ 라고 시인은 묻는다.

‘꽃’ 이란 그것을 가진 본체(꽃나무)가 표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절정의 시대(시간)이며, 그것은 그가 가진 권력이며 영광이라 할 수 있다. ‘꽃’이 진다는 것은 그 권력과 호시절이 없어졌다는 것이며, 그 자리는 한물간, 힘을 잃은,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쓸쓸한 곳이라는 말이다. 인간사에서 그런 쓸쓸한 곳으로 찾아 들기란 쉽지가 않다. 끝없이 권력 쪽으로만 기우는 우리에게 시인은 묻는다. 힘과 아름다움을 잃는 존재들에게 우리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느냐. 고, 자신의 최대치 가치가 떨어져 버린 꽃나무에게 ‘손 흔들며’ 다가가는 나뭇가지와 ‘한 조각 하늘을 물어’ 갖다 주는 새 들을 통해 시인은 자연이 가진 본래의 성품인 이타심(利他心)을 본다. 그 이타심이야 말로 형상의 아름다움 그 이후의 ‘아름다움’의 탄생이지 않을까.

그런 아름다움은 이기적인 인간사에도 발현되기도 하는데, 그것을 표착한 시인의 시선이 범상치 않다.



          노점상인 몇이 모여

          점심을 먹습니다


          간간이 던져주는

          밥술 혹은 반찬 몇 점


          하나 둘 모여듭니다

          동네 새들

          고양이들




                 -「만다라의 품」전문




  이 시를 읽으면 눈에 비치는 풍경 그대로가 ‘만다라’이다. 길가에 좌판을 놓고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 노점 상인들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비약하자면 길가에서 노점상을 할 형편이면 생활에 있어 풍족한 부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사회의 약자들인 셈이다. 사회약자들의 최우선 과제가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일 터,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밥’에서 얼마를 떼어 나눔을 행한다. 그리고 그 나눔에는 분별을 두지 않는다.

‘밥 혹은 반찬 몇 점’일 뿐이지만 엄연히 자신들의 ‘밥’인 소중한 것은 다시 새, 고양이, 의 ‘밥’이 되는 이타행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같은 먹이를 먹으며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새, 고양이는 결국 서로 다른 종(種)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라는 불이(不二) 사상에 근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불교적, 불교적인 시인의 시세계는 다음 시편에서도 좀 더 깊이 확인 되고 있다.



          흰 새가 묻힌 자리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하나 둘 지는 꽃잎

          천계(天界)로 날아갑니다


          흰 새가 꽃이 됩니다

          그 꽃 다시 새가 됩니다



                  -「날아가는 성좌(星座)」전문



  죽은 새가 꽃이 되고, 그 꽃이 한 생을 살다가 지면 다시 새가 되는 이치! 새, 꽃, 이라는 사물에 대한 국한성이 아니라 하늘⟶땅, 땅⟶하늘, 하늘=땅, 이라는 포괄적 공간에 대한 연기성이며 그것의 ‘생멸인연법(生滅因緣法)’의 이치를 보여 주고 있다. 불교의 아뢰야식에서 말하고 있는 비일비이(非一非二)의 개념이며 나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불교의 근본사상에까지 다가간다. ‘엘리베이터 천장에 붙어있는 늙은 거미’(「아주 가벼운 외출」)가 부처의 현신(現身)임을 알아차리는 혜안 또한 불교사상을 지향하는 시세계의 현 위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세계를 이끌어 가는 원천은 그의 불교적 사상과 함께 시작(詩作)에 임하는 태도(정신)에 있다고 본다. 다음의 시편에서 발견되는 시인의 시작(詩作) 태도는 그가 시인으로써의 소명에 얼마나 철저하게 임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시인’이라는 이름을 받아 가지기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빗방울 속 늙은 지렁이

          한 줄 시를 쓰고 있다


          오래전 잇사의 시*

          화답(和答)하려 하는 걸까

   

          오롯이 귀 기울이면

          빗소리

          아니 눈물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7)는 일본 근세의 대표적 하이쿠 시인이며,

             ‘늙은 개가/ 지렁이 울음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네’라는 작품이 있다.




                           -「길에서 만난 시인」전문



 ‘지렁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토룡(土龍)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가해 행위에도 좀처럼 대항하지 않는 무력(無力) 혹은 무심(無心, 慈悲)의 표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시각엔 한낱 미물일 뿐이다. 땅속에서 길을 내고 살고 있어야 할 지렁이가 땅위로 올라와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은 무방비의 처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위험 군에 노출 된 ‘늙은 지렁이’가 ‘길’을 가는 행위를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 시인의 눈에 비친 지렁이는 ‘시인’인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라면 목숨 걸고 시를 써야 한다는 전제일 수도 있다. 위의 시 「길에서 만난 시인」의 각주에서 보듯이 잇사는 근세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200여 년 전의 사람이다. ‘빗방울 속 늙은 지렁이’는 과거와 현재의 교각이며 시인과 잇사가 동시간대에 서서 주고받는 ‘시적 대화’이기도 하다. 힘(土龍)과 무력(미물), 양면을 가진, 혹은 그 경계를 지운 지렁이에게서 자신(시인)을 보고 그런 자신을 통해 200년 전의 잇사(대표 시인)를 본 시인은 ‘시인’ 이라는 관(冠)을 쓴 자신에 대한 변을 이렇게 내어 놓는다. 단 한 줄의 시를 쓰더라도 자신의 전부를 노출시킨 후 ‘눈물’ 속에 담긴 울음이어야 시(詩)라 감히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작고 여린 것(새, 거미, 지렁이 꽃)들에게 다가가 그 사물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들이 곧 시대의 목소리가 되기를 기원하는 그의 시세계는 자연만물과 인간의 융화세상(融和世上)을 꿈꾸는 구도의 장(場)이며 진언이다. 미물인 한 마리 지렁이를 통해 잇사(과거)와 자신(현재)을 시인이라는 카테고리로 엮어 놓고 스스로 ‘눈물’ 속에 갇혀 지내는 시인이 만들어 내는 ‘미망(迷妄)의/ 저민 시어(詩語)들’(「고사목(枯死木)」)이 ‘목각 새의/ 계명성(鷄鳴聲)’(「솟대를 위하여」)으로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