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ry/내 작품평·해설

배우식, '봉황의 시조시학'《나래시조》2012. 여름호

이원식 시인 2012. 7. 9. 00:01

■배우식, '봉황의 시조시학'《나래시조》2012. 여름호 pp.194-196.

 

 

 

                 초침(秒針)이 멈추었다

                 정적(靜寂)은

                 오지 않았다

 

                 낡은 욕조바닥으로

                 또옥 또옥

                 물방울소리

 

                 올 깊은 금선(琴線)이었다

 

                 아주 맑은

                 경전(經典)이었다

 

                                                   - 이원식,「낮은음자리」전문(《유심》,2012년 05/06월호)

 

 

   이원식의 시조「낮은음자리」는 한 번 읽고 덮어버리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며 다시 보고 싶어진다. 다시 열고 읽어보면 다른 곳으로 책장이 넘어가지 않고 또 한참을 읽게 하는 묘한 매력의 작품이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여운'이라는 단어이다. 그렇다. 이원식 시조의 근원에는 '자미(滋味-여운의 미)'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원식 시조에는 이 여운과 함께 풍이 흐르고 있다. 바람은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기세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

         렇기 때문에 심각하고도 절실하게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으로부터 출발해야하며, 반복적으

         로 문장을 고쳐가면서 문장의 표현을 다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골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 유협, 최동호 역편,『문심조룡』「풍골(風骨)편」, 민음사, 1994년, 351쪽.

 

   이원식은 초장의 첫 구에서 문득 "초침(秒針)이 멈추었다"라고 진술한다. 여운의 시작이다. 물리적인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았지만, 시인 내면에 존재하는 시계의 초침이 멈춘 것이다. 시인은 언제 이런 느낌을 받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지만 문맥상으로 보아 시인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시인 자신이 문득 혼자라고 느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두 번째 구에서 "정적(靜寂)은 오지 않았다"라고 진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상에서 혼자만이 존재하는 자신만의 세계는 당연히 고요할 것임에도 정적이 찾아오지 않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제 나는 혼자이다"라는 생각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순간 시인은 실제로 떨어지는 소리일 수도 있고 환청일 수도 잇는 물방울소리를 듣는다.

 

   중장에서 시인이 듣는 "또옥 또옥"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긴 여운을 준다. 그 물방울 소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시인의 맥박 뛰는 소리이기도 하며 또한 "나 혼자 있지만 질기게 살아 있다"는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종장에서 물방울 소리의 청각이 "금선(琴線)"이며 그런 악기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종장의 마지막 구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아주 맑은 경전(經典)이었다"라고 진술한다.

   『문심조룡』에서 "천(天) . 지(地) . 인(人)이라는 세 가지 영구불변의 이치를 설명한 것을 가리켜 '경(經)'이라고 부른다. 경(經)이란 영구불변의 근본도리를 설명한 것이어서 고치거나 지워버릴 수 없는 큰 가르침이다."(-유협, 최동호 역편,『문심조룡』「종경(宗經)편」, 54쪽) 라고 말한다. 이런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경전(經典)이다. 시인은 "시계의 초침이 멈춘" 것 같은 절박하고도 고립된 상황 혹은 세계에서도 자신은 끊임없이 존재하여  천(天) . 지(地) . 인(人)의 근본도리를 다하여 금선(琴線)의 삶을 살겠다는 아주 맑은 여운의 시조이다.

   유협은 자신의 저서인 『문심조룡』에서 "문골(文骨)과 문풍(文風) 그리고 문채(文采)를 갖고 있으면 그러한 문장은 문학의 영역에서 봉황이다."라고 말했다. 

   시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작품의 강건한 구조 그리고 뭉클한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과 적절한 수식적 표현의 미적인 형식이 함께 조화를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을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봉황의 시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현시대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움'을 얹는다면 빛나는 날개를 펼치고 시조세계의 하늘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봉황의 시조'를 쓰기 위해서는 우선 '미적체험'이 중요하다. 이런 '미적체험'을 위해서는 '최적의 마음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유협의 신사(神思)편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봉황의 시조시학론'을 끝맺기로 한다.

 

               문학적 구상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김민나,『동양문예학의 집대성, 문심조룡』, 살림, 2005년. 228쪽)

 

 

 

                                                     《나래시조》2012.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