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젊은 시조의 형상화 방식, 진화(進化)의 다양한 표정들」
《열린시학》2012.봄호 pp.249-250
오늘도 참 많이 울었다
풀에게
미안하다
이 계절
다 가기 전에
벗어둘
내 그림자
한 모금 이슬이 차다
문득 씹히는
내생(來生)의 별
- 이원식, 「귀뚤귀뚤」 전문(《열린시학》 2011년 겨울호)
선적 불교적 사유를 함축하는 단수의 미학이 돋보이는 시다. 이 시에서 이원식 시인은 소소한 자연물에 대한 미안함과 생을 다 비우는 법에 대한 성찰의 과정을 보여준다. “오늘도 참 많이 울었다”는 표현 속에서 울음의 지속성이 내포되어 있어, 짧은 시행 안에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함축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 오랜 울음 속에서 화자는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계절’은 화자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며, 현생이며, 현재의 자신을 벗어두고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을 예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화자가 머금은 “한 모금 이슬” 속에서 문득 “내생(來生)의 별”이 씹힌다. 우리의 현생은 하늘에 뜬 별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존재다. 이제는 귀뚜라미도 떠나야 할 늦가을, 그동안 밟고 다녔을 풀에게 미안함을 고백하는 순간, 자신의 그림자가 욕망의 허울뿐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 시는 마음을 비워야 할 때를 비로소 아는 것, 물질이나 감정에 사로잡힌 생각들을 비우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내부를 채우는 일임을 독자에게 일깨운다. 장자는 마음을 닦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은 나무들도 그 꽃과 잎들을 떨구며 나목(裸木)의 상태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가을에 화자는 무성한 잎과 꽃처럼 욕망으로 가득 찼던 자신을 들여다보며 “이 계절/ 다 가기 전에/ 벗어둘/ 내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이다. 자아성찰의 과정을 단수로 압축한 시다.♣
《열린시학》2012.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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