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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새로운 소리를 좇아 끝없는 구도의 길"/김갑수

이원식 시인 2007. 11. 4. 22:35

 

[이런사람]"새로운 소리를 좇아 끝없는 구도의 길"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속에서 모진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시인이자 오디오 마니아인
김갑수(47)씨의 삶 한 자락에도 그 흔적이 묻어 있다. 30년 가까이 소리의 매력에 빠져 살아온 그는

최근 ‘더 좋은 소리’를 찾아 음악감상 공간을 지하로 옮겼다. 마포에 자리 잡은 오디오 룸에 들어서면 입이 딱 벌어진다.

40평가량의 툭 터진 지하공간은 ‘작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천장과 사방 벽에는 사각기둥 모양으로 튀어나온 각종 음향판들이 빼곡히 부착돼 있고,

‘무대’ 중앙에는 ‘하츠필드’ ‘알텍A5’ ‘AR3’ ‘던텍
소버린’ 등 4조의 스피커 명기(名器)와 각종 앰프가 포진해 있다.

무엇보다 양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2만여장의 LP판이 방 안을 압도했다.

김씨는 최근 ‘알텍 A5’를 새로 들여놓느라 부산했다. ‘알텍 A5’는 과거 미국의 영화관에나 설치됐던 전설적인 스피커로, 성능이 좋아 마니아들을 위해 가정용으로 개발됐다. 그는 30대때 처음 이 기기를 소유한 적이 있었으나 공간이 비좁아 얼마 갖지 못하고 남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제 새로운 지하공간에서 ‘알텍 A5’는 그 진가를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오디오 마니아는 끝없이 새로운 소리를 좇는 습성이 있지요.” 마음은 늘 한곳에 정착하고 싶지만, 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인 ‘튜닝’이 끝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소리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 고독한 구도의 길 같았다.

“기기는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한계가 있어요. 사운드의 반 이상을 공간이 만들어 주지요.” 그가 널찍한 지하공간을 찾아간 이유다. 흔히 음악 쪽의 오디오 마니아 하면 좋은 기기를 사 모으는 사람과 새 음악을 찾아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쪽으로 분류되는데, 그는 양쪽 다 몰두했고 모두 다 일가를 이뤘다. 김씨는 “오디오 룸을 유지하는 일은 백조가 우아한 자태를 보여주기 위해 물 밑에서는 수없이 발을 젓는 것 같다”고 어려움을 내비쳤다.

“팝, 재즈, 월드뮤직 등 모든 장르를 두루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클래식을 가장 많이 듣는다”는 김씨는 감미로운 것만이 좋은 음악은 아니라고 했다. 패스트푸드에 설탕을 바르면 입 안이 달긴 하지만, 먹고 나면 속이 거북해진다는 말로 비유했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의 진수를 어렴풋이 알 듯했다.

‘세상에 없는 소리’를 듣기 위해 끊임없이 기기를 교체해야 하는 음악 인생. 어렵게 고가의 기기를 교체하고도 “오디오 세계에서 2년은 굉장히 긴 기간”이라는 말에는 할 말을 잊었다. “기기의 우열 때문은 아닙니다. 일종의 기계병이지요.” 김씨는 ‘기계병’을 앓는 마니아들이 국내에는 무척 많다고 한다.

그에게 소리를 좇는 여정은 두고온 고향을 찾아가는 일. 음향의 세계에 끝은 없지만, 만족의 범위는 각자 다르다고 한다. 수천만원대를 호가하는 기기를 갖고도 판은 몇십 장도 안 되는 사람, 판은 1만장이 넘어도 기기는 조촐한 보급품에 만족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한군데에 오래 안주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마니아다.

김씨의 어린 시절은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문화적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우기 일찍 자취 생활을 시작해 늘 떠돌이 생활이었고, 친구들과는 사뭇 역전된 방식으로 처절하게 살아야 했다. 음악적 환경에는 근처도 못 갔지만, 타고난 기질 때문일까.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음악에 빠져 버렸다. 다른 데는 별 재주가 없는 것도 한 요인이었다. 돈만 생겼다 하면 음반을 사서 듣거나 책을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집도 한 권 냈지만, 음악만큼 천착하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오디오’라는 고독과 친해졌다.

“어느 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집을 장만한 친구도 있고, 차를 가진 친구도 있는데, 저는 뭘 했나 회의가 들더라고요.”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놓친 줄 알았다. 그러나 음악에 쏟은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36살에 늦깎이 결혼을 했지만, 모두가 부러워하는 영민한 아내를 만나고 아들까지 뒀다. 뒤늦게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셈이다. 아내는 구애하는 남자들을 모두 마다하고, 독신아파트 전세보증금 300만원밖에 없던 이 ‘고독한 오디오 마니아’를 선택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짜리 아들은 “아버지처럼 음악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삶은 존경한다”며 당찬 모습을 보인다. “음악이라는 시간 속에 머물렀던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시간은 흘러갔겠지만, 음악 속에서 행복했고, 행운도 낚았지 않습니까.”

그는 두 권의 음악 관련 에세이를 펴내 호평을 얻었고, 프리랜서로 3년째 CBS FM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아름다운 당신에게’(오전 9∼11시)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문화와 예술을 논하며 지식인 소리를 듣는 것도 음악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그는 한 우물을 파라고 권한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면 굳이 다른 분야를 체험하지 않아도 통하게 된다는 것.

그는 최근 자신의 분신과 같은 마포 ‘오디오 제국’을 일반에 공개했다. 이곳에서 벌써 3회째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그의 끝없는 음악인생은 이제 메마른 도시를 적시며 이웃과 함께 곰삭아 들고 있다.
<미디어다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