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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에 나타난 ‘서정’의 양상들― 감각·시간·기억 / 유성호

이원식 시인 2007. 11. 4. 23:09

현대시조에 나타난 ‘서정’의 양상들
― 감각·시간·기억



유성호
(문학평론가, 교원대 교수)



1. ‘동일성의 원리’와 ‘서정’의 다양한 양상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서정시’의 가장 근원적인 형상화 원리는 대상과의 상호 작용을 통한 주체의 정서 발현 과정 곧 ‘서정(抒情)’에 있다. ‘서사(敍事)’가 일정한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규정되는 사물의 연속성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면, ‘서정’은 낱낱의 사물들에서 주체가 겪는 순간적 경험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며, 거기서 비롯되는 주체의 인식이나 정서적 반응에 가장 직접적인 자기 근거를 둔다. 따라서 우리가 서정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사물의 외관이 갖는 미세한 특성에 대한 섬세한 지각(知覺)은 물론,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주체의 정서적 반응을 읽는 일이다. 이때 주체는 세계로부터 소외되거나 초월하지 않고, 생의 순간적 파악을 통해 세계에 참여한다. 이를 두고 주체와 대상의 상호 융합을 토대로 한 이른바 ‘동일성의 원리’라고 부르는 관행은 제법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로 올수록 주체와 대상의 상호 융합보다는 그 사이에 날카롭게 개재하는 불화나 균열의 양상이 많이 포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주체가 대상에서 경험하는 상반되고도 복합적인 반응이며,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아이러니’의 시정신이다. 이는 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속성들인 ‘사물화’라든가 인식의 ‘파편성’ 그리고 ‘신성(神聖)의 상실’ 같은 내외적 정황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가 이른바 ‘비(非)동일성’이 강화되는 이행기적 징후로 가득하다고 보는 시각은 이와 같은 현대시의 복합적 성격에서 말미암는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정’과 ‘반(反)서정’ 곧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원리는 제각각 현대 사회의 중요한 양면적 속성들을 대변하면서 상호 보완적인 서정시의 존재 원리가 되고 있다.
최근 씌어지고 있는 현대시조는 이 같은 속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동일성의 원리’에 압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물론 이는 ‘시조(時調)’가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정형 장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시대에 빈번하게 목도할 수 있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균열이나 모순 같은 데 눈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 자체로 인식의 단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현대시조의 협애한 권역으로 지적될 만하다. 따라서 이는 우리 시대의 현대시조가 치르고 있는 존재론적 명암(明暗)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시조 시인들은 ‘동일성의 원리’를 적극 추인하면서도 실로 다양한 ‘서정’의 계기들을 마련하고 있다. 그들은 사물의 외관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정서를 덧입히는 방법, 근대적 시간 의식을 뛰어넘으면서 신화적·역사적·체험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 사물의 안팎에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거슬러올라가는 방법 등을 통해 ‘서정’의 양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최근 발표된 몇몇 시조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와 같은 서정의 양상들 곧 감각·시간·기억의 단층(斷層)에서 피어오르는 줄기들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또한 이를 통해 최근 우리 현대시조에 나타난 문제점들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2. ‘감각’과 ‘해석’의 결합

원래 ‘묘사(描寫)’는 사물의 외관을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행위 및 결과를 일컫는 개념이다. 따라서 묘사를 통해 우리는 사물의 가장 감각적인 직접성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묘사’가 건조하고 사실적인 렌즈를 통한 감각적 재현에만 그친다면, 그러한 서경(敍景) 편향의 소품은 주체의 개입이 최소화되면서 한 편의 산뜻한 풍경첩에 머물게 된다. 따라서 ‘묘사’와 함께 그 안에 주체의 세계 해석이나 판단이 자연스럽게 덧입혀지는 것이 우리가 한 편의 시 안에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방편이 될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사물의 외관이나 속성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되, 거기에 주체의 해석과 반응을 덧보탬으로써 부드럽고 완만한 정경교융(情景交融)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움 문턱쯤에 // 고개를 // 내밀고서 // 뒤척이는 나를 보자 // 흠칫 놀라 // 돌아서네 // 눈물을 다 쏟아 내고 // 눈썹만 남은//내 사랑
―김강호, 「초생달」

그리움을 건너기란/ 왜 그리 힘이 들던지 // 긴 편지를 쓰는 대신/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 사흘만/ 머물다 떠날/ 저/ 눈부신/ 寂滅의 집.
―민병도, 「목련」

선인장은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가진다/ 잎새가 되지 못한 저 가시의 공격성/ 바람을 상처내면서 제 존재를 묻는다 // 아무도 모래 위에 집을 짓지 않지만/ 척추를 곧추세운 사나운 직립의 꿈/ 햇살을 등지고 서서 생명들을 키운다 // 그늘에선 전갈이 덧난 종기를 삭히고/ 사막을 건너와 온 몸으로 수액을 빨던/ 개미의 휘어진 등뼈 새순 틔워 덮는다
―이달균, 「선인장」
모든 사물의 외적 인상은 그 자체로 이미 감각적 실재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어떤 일정한 문맥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발화(發話)이기 때문에, 그 ‘감각적 실재’는 주체의 세계 해석 여하에 따라 한 편의 시 안에서 재(再)문맥화된다. 김강호의 「초생달」과 민병도의 「목련」은 공히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자연 사물에 덧입히는 고전적인 작법을 택하고 있는데, 이때 사물의 외관은 철저하게 주체의 윤색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먼저 「초생달」은 ‘눈썹’과 ‘초생달’을 등가적으로 이어놓는 전통적인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당의 절편(絶篇)인 「동천(冬天)」의 발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대상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그리움의 정조를 주제로 담고 있다. 시인이 보기에 초생달의 영상은 “그리움의 문턱”에 고개를 들이민 채, 뒤척이는 나를 보고는 돌아서 눈물짓는 여인상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그 여인의 이미지가 ‘눈썹’이라는 가장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대상으로 은유되면서, 이 시는 그 여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의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다 쏟아 내고 // 눈썹만 남은 // 내 사랑”은 바로 여인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묘사적 이미지이다.
「목련」 역시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목련이라는 “집 한 채”에 덧입히고 있는 작품이다. 개화와 낙화 사이에 있는 짧은 시간을 “사흘만/ 머물다 떠날/ 눈부신/ 寂滅”로 표현하는 대목은 이 시인의 초월적이고 심미적인 정서적 반응을 일러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대신 스스로 그리움의 집채가 되어버린 ‘목련’의 화려한 외관을 세밀하게 그리지 않고, 시인은 그로 인한 자신의 정서적 반응과 세계 해석을 좀더 강조함으로써 이 작품을 감각 편향에서 건져내 정서적 반응의 시편으로 바꿔 놓고 있다.
반면 「선인장」은, ‘선인장’이라는 비교적 특수한 소재를 다루면서, 주체와 대상과의 온전한 융합을 순간적으로 가로막는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작품이다. 원래 ‘선인장’이 사막의 이미지를 그 배경으로 거느리고 있다거나, ‘가시’ 같은 날카로운 공격성의 외양을 띠고 있다거나 하는 것이 그와 같은 ‘단절’의 이미지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시인이 보기에 “선인장은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가진다”. 그리고 “잎새가 되지 못한 저 가시의 공격성”으로 “바람을 상처내면서 제 존재를 묻”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존재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 형식을 안간힘으로 지키고 있는 ‘선인장’은 “척추를 곧추세운 사나운 직립의 꿈”으로 “생명들을 키”우면서 그 단절의 이미지를 극복한다. 시의 후경(後景)으로 등장하는 “전갈”이나 “종기” 혹은 “사막” “개미” 같은 불모의 연쇄적 이미지가, “새순 틔워 덮는다”는 긍정의 시선 앞에 소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시인들은 자연 사물(달, 목련, 선인장)에 자신의 경험이나 정서적 반응을 투사하면서 아름답고 서늘한 풍경과 그 풍경 뒤에 움츠리고 있는 주체의 심미안과 세계 해석을 담고 있다. 아주 오래된, 서정시의 낯익은 풍광들이다. 이는 또한 최근의 현대시조가 담고 있는 ‘동일성의 원리’의 확연한 실례라고 할 것이다.

3. ‘시간’ 경험의 재구성

인간은 ‘시간’이라는 물리적 실체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 형식을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 모두 ‘시간’의 개념 위에서만 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초(超)시간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하는 불가능한 꿈의 개념적 잔영(殘影)일 뿐이다. 이렇듯 인간은 철저하게 시간적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 속에서 살지 않고, 저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시간 속에서 실존을 영위한다. 그래서 시간은 선험적이고 객관적인 물리적 실체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탈바꿈이 분절적이고 직선적인 근대적 시간 의식에 대한 대항(對抗) 구도 속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깊은 암벽 두드리자 숨은 모닥불 일어서고 // 날 선 돌작살에 끌려 온 선사의 바다 // 겨울밤/내 꿈하늘 가른다/ 우우우우 고래떼.
―송선영, 「겨울 암각화 ―반구대」

나무로 깎아 만든 고려사가 저렇던가/ 6백 년 그 세월을 가부좌로 앉았다가/ 대장경 어느 구절에 글자로써 세운 집 // 배흘림 기둥으로 층층이 불을 밝혀/ 화엄인가 극락인가 말씀의 구중궁궐/ 오늘도 청동빛 물살 헤엄치는 풍경소리 // 지도엔 없는 나라 여기에 있었구나/ 만지면 부서질 듯 햇빛도 고려 햇빛/ 돌에도 피가 도는가 부석사 무량수전
―유재영, 「지도엔 없는 나라 ―부석사 무량수전」

「암각화」는 반구대의 암각화에서 고고학적 열정을 기울이고 있던 시인이 겪는 신비로운 시간 경험을 담고 있다. 차가운 겨울, 암각화에서 “숨은 모닥불”을 연상해 내는 ‘냉/온’ 대조 기법(촉각)이나, “선사의 바다”에서 고래떼의 함성을 환청(청각)으로 듣는 것이나, 날 선 돌작살의 이미지(시각)를 그리고 있는 것 등이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은 매우 복합적인 감각을 담고 있다. 이는 그 안에 오래된 시간의 격절을 넘나드는 시인의 신화적 시간 인식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신화’라는 것은, 오래 전 인간들이 따듯한 감성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방식을 이야기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사실(事實)은 달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되고, 햇빛에 바래면 역사(歷史)가 된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이 작품은 그 달빛에 물든 “겨울밤”에 예민한 시인이 풍부하게 느끼고(촉각) 듣고(청각) 보는(시각) 신화적 시간의 기록이다.
「지도엔 없는 나라」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어버린 시간에 대한 성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라는 수백 년을 건너온 사물에서, 시인이 발견하고 있는 것은, “햇빛도 고려 햇빛”이고 “돌에도 피가 도는” 시간 자체의 무화(無化)이다. 그러니 그 같은 ‘시간’이 지도 안에 담길 리가 없지 않은가. 원래 ‘지도(地圖)’라는 것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약호적 체재이다. 그러니 그 지도에는 없는 은폐된 혹은 가라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서정시는 바로 그 불가시적·비물질적인 본질과 비의를 탐색하는 운명을 띠고 있는 양식이다.
이처럼 시인들은 ‘신화’와 ‘역사’라는 시간 형식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여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오랜 지층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개별화된 자연인의 삶 속에서 체험되는 ‘시간’도 있다.

어디쯤 삭고 있을까, 손때 절은 사다리/ 삐걱대며 오르면 거기 한 우주와 놀던/ 시간이 풍화를 딛고 고서처럼 쌓인 방/ 먼지 낀 갈피마다 길 속의 길 찾느라/ 내 영혼 까치발이 티눈 박힌 창 너머/ 별들도 눈이 붉은 채 숲을 오래 걸었다 // 구불텅한 길들 모두 곧게만 닫는 지금/ 그 골방 옛 섶에 누에처럼 들고 싶다/ 곰삭은 달빛 한 자락 품고/ 비단길 짜고 싶다
―정수자, 「다락방」

난 한 촉 벌고 있는 소액환 창구에서/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을 본다./ “이것 좀 대신 써 주소, 글을 씰 수 없어예.”/ 꼬깃꼬깃 접혀진 세종대왕 얼굴 위로/ 검게 젖은 빗물이 고랑이 되어 흐른다/ “애비는 그냥 저냥 잘 있다. 에미 말 잘 들어라.”/ 갯벌 매립 공사장, 왼종일 등짐을 져다 나르다/ 식은 빵 한 조각 콩나물 국밥 한 술 속으로/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 강물로 뒤척인다./ 새우잠 자는 부러진 스치로품 사이에/ 철 이른 냉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 울커덩 붉어지는 눈시울,/끝나지 않은 삶의 고리
―하순희, 「비, 우체국」

「다락방」은 고옥(古屋)의 구조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온 지상과 지붕의 중간 지점에 있는 ‘다락방’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고층 아파트가 보편화되어버린 “구불텅한 길들 모두 곧게만 닫는 지금”에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낡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낡은 ‘다락방’이 시인에게는 “손때 절은 사다리”나 “내 영혼 까치발이 티눈 박힌 창”으로 구성된 물리적 실체이자, “한 우주와 놀던” 그리고 “시간이/ 풍화를 딛고 고서처럼 쌓인 방”이라는 형이상학적 공간인 것이다. 또한 시인은 ‘다락방’을 책(고서)으로 비유한 후, 그 갈피에서 “길 속의 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또한 그 순간에 “별들도 눈이 붉은 채 숲을 돌아다녔다”고 회상한다. 이처럼 온 우주가 화창(和唱)하는 고요의 공간에서 시인은 다시 누에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거기서 “곰삭은 달빛 한 자락 품고/ 비단길”을 짤 수만 있다면 하고 불가능한 시간의 가역성(可逆性)을 꿈꾼다. 이 시편은 아득한 시간의 격절 속에서 그 시간을 건너온 시인의 형이상학적 사고와 우주적 상상력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 작품이다.
「비, 우체국」은 우리가 흘깃 지나치기 쉬운 풍경을 형상화하는 시인의 남다른 예민함이 빛나는 작품이다. 비 내리는 우체국 안에서 오랜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는 사내가 아들에게 짤막한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그는 “얼어 터져 피가 나는 투박한 손”으로 글씨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안녕과 “밤새운 만장의 그리움”을 전하는 “갯벌 매립 공사장” 인부이다. “식은 빵/ 콩나물 국밥/ 새우잠/ 스치로품/ 붉어지는 눈시울” 등의 연쇄적 소재가 일러주듯 그는 노동의 고단함과 떠나온 혈육에 대한 그리움으로 충일하다. 그 정서적 상태가 비 내리는 늦겨울, 우체국의 분위기를 따듯하게 데우고 있다. 이 또한 노동에 몸을 맡긴 한 개인이 온몸으로 감당하는 ‘시간’의 무게가 녹아 있는 작품이다.
이같이 집단화된 ‘신화’나 ‘역사’ 같은 시간 경험이든, 개인화된 시간 경험이든, 근대적 시간 의식을 부정하면서 씌어진 시편들은 하나같이 이 시대의 물질 편향이나 최상의 수행성을 강조하는 운산(運算)들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서정시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동일성의 원리’가 폭넓게 관철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주체가 겪는 ‘기억’의 현상학

서정시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사물’들에 대한 기억의 현상학이다. 그런가 하면 서정시는 또한 사물들 자체의 기억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다. 생명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존재의 오래된 ‘기억’으로 환치하는 서정시의 작법이 여기서 비롯된다.
이 또한 현실적 시간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고유하게 체험하는 시간으로 귀환하려는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외따로 떨어져 있던 사물과 사물 사이에 연쇄적인 연관성의 파동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기억’의 매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1/ 칼끝/ 닿을 때마다/ 찢어지는 먼 데 하늘 // 체액처럼 피는 끈적한 과즙 향기 // 둥글게/ 갇히어 떨던/ 바람 소리 시리다 // 2/ 상한 부위를 곧장/ 파내어 버리듯// 모질지 않으면/ 영영 도려내지 못할 // 제 속에/ 도사린 상처/ 불 밝혀 다스리듯 // 3/ 칼끝/ 닿을 때마다/ 찢어지는 바람 소리 // 저물녘 못물 위로/ 산그늘 사위어 들 듯 // 둥글게/ 깎이는 허공/ 붉게 흩어지고 있다
―이정환, 「과수밭에서」

길 잘라내며 넘치는 붉덩물 붉덩물 속에/ 나는 벗어던지네/ 전족(纏足)의 신짝들 // 당신의 에피소드로 만족했던 발의 기억들 // 무두질 잘된 추억으로 감싼 길을 버린 후/ 새신 아직 얻지 못해 얼어 터진 붉은 맨발 // 아무도 가둘 수 없네/ 씩씩하게 자라네
―서연정, 「장마」

수레바퀴 자국에도 마음 패이는 진흙길에/ 기침처럼 쏟아지는 하얗게 질린 벚꽃/ 고단한 그림자들은 해에까지 뻗어 있다 // 보이지 않는 창마다 노을이 퍼지고/ 돌아오는 지상의 모든 길에 매달려/ 꺼질 듯 꺼지지 않고 깜박이는 등불 하나 // 저녁의 젖은 손들이 땅 아래로 내려올 때/ 산비둘기 울음으로 뜨는 벚꽃 몇 송이/ 허공에 떨리고 있는 따뜻한 길을 본다
―박권숙, 「숨은 길」

「과수밭에서」와 「장마」는 ‘과일’과 ‘장마’ 같은 자연 사물과 현상조차 알고 보면 여러 사물들끼리 혹은 사물과 주체의 능동적 교섭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해주는, 말하자면 사물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과수밭에서」는 사물들의 현존이 녹녹치 않은 상호 내적 연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칼끝”이 닿고 있는 것은 과일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시인은 “먼 데 하늘”의 찢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과일의 향기에서 “둥글게/ 갇히어 떨던/ 바람 소리”와 “찢어지는 바람 소리”도 함께 듣는다. “제 속에/ 도사린 상처”를 다스리면서 “칼끝/ 닿을 때마다 // 저물녘 못물 위로/ 산그늘 사위어 들 듯 // 둥글게/ 깎이는 허공” 역시 과일의 불그레한 색채를 물들이면서 “붉게 흩어지고 있”다. 그러니 ‘과일―하늘―바람―산그늘―허공’이 모두 무심히 떨어져 있는 사물들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원인―결과’도 되고 ‘안-밖’도 되며 동시적 현존을 구성하는 ‘동전의 양면’이 되기도 한다. 물론 과일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허공의 흔적은 모두 사물 자체의 기억이기도 하다.
「장마」는 호탕하게 흘러내리는 홍수 속에 “전족(纏足)의 신짝들 // 당신의 에피소드로 만족했던 발의 기억들”을 벗어던지는 시인의 단호함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무두질 잘된 추억으로 감싼 길을 버린 후/ 새신 아직 얻지 못해 얼어 터진 붉은 맨발”은 이 붉게 흘러가는 도도한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그야말로 흥에 겨워 되살아난다. 이제 아무도 그를 구속하거나 전족으로 붙잡아매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전족은 “씩씩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여인의 발이 되리라. 기억 속에 담겨 있는 타자로서의 억압에 저항하는 이 같은 시편이 의도하는 것은 이제 “에피소드”의 삶이 아닌 자기 플롯을 갖는 주체적 삶에 대한 강렬한 선언이다. 그것이 타자로서의 기억을 되불러, 그것을 벗어버리는 “전족의 신짝들”의 형식으로 짜여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숨은 길」은 “수레바퀴 자국” 질펀한 “진흙길”과 그 주위에 피어난 벚꽃들의 “고단한 그림자들”을 보면서 귀가하던 시인의 기억을 시의 내질(內質)로 삼고 있다. “보이지 않는 창마다 노을이 퍼지고/ 돌아오는 지상의 모든 길에 매달려/ 꺼질 듯 꺼지지 않고 깜박이는 등불 하나”는 그 고단한 귀갓길에 비친 가녀린 빛의 이미지들이다. 거기서 시인이 보고 있는 “벚꽃 몇 송이”는 자신이 놓칠 수 없는(이제까지 놓치고 살아온) “허공에 떨리고 있는 따뜻한 길”이다. 그것을 시인은 “숨은 길”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숨어 있던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시인의 끈질긴 ‘바라봄’의 행위 때문이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끼인 기억을 찾아 올라가 그것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이 같은 시각은, 서정시의 오래된 속성을 재현하는, 다시 말하면 주체와 사물 사이의 친화력을 드러내는 ‘동일성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왜 현대시조인가?

우리가 ‘시조’를 정형의 율격에 안정된 시상(詩想)을 담는 전통적인 시가 양식으로 인식하는 관행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조 문학에는 이미 ‘공통 감각’에 속하는 정격(正格)의 정서와 형식이 담기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고, 전통적인 정서로부터의 파격(破格)이나 그것의 전복(顚覆)을 꾀하는 해체 지향의 언어들이 담기는 것은 다소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시조 미학은 그 동안 사물과의 불화보다는 화해, 새로운 것의 발견보다는 익숙한 것의 재확인, 갈등의 지속보다는 통합과 치유쪽으로 무게중심을 할애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단견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처럼 ‘단순성’이 아닌 ‘다양성’의 시대, 그리고 ‘서정’의 일원성보다는 ‘아이러니’의 복합성이 미학적 주류로 기능하는 후기 현대의 시대에 전통적 형식인 시조가 갖는 한계가 비교적 명백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쉽지 않다. 다시 말하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정언에 비추어 볼 때,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상징되는 현대성의 징후들을 정형의 양식에 담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한계를 노정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왜 꼭 시조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의 교양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고시조들은 ‘자연’을 이상적 형식으로 추구하였고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주제들을 형상화해온 경우들이 특히 많았다. 그래서 우리가 고시조를 읽을 때 그러한 주제에 동화(assimilation)와 투사(projection)의 경험을 흔연히 치러온 것도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시조의 화자와 청자는 입장을 달리해 미적 균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인과론, 이성에 의한 예측 가능성, 계기적인 선형적(線形的) 사유들이 많이 그 힘을 잃고, 그 대신에 불확정성의 원리, 불온한 상상력, 입체적이고 다양한 아이러니적 사유 등이 세계의 실재에 더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모든 시 창작의 근원적 동기가 자기 확인의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할지라도,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그 ‘거울’조차 반질반질하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흐리고 어둑하며 심지어는 깨어진 거울일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깨어진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자신의 얼굴은 나르시스처럼 매혹에 가득찬 모습이 아니라, 자기 연민 내지는 자기 부정의 갈등을 가져다주는 복합성의 얼굴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매혹과 몰입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환경적 모순과 맞서고 있는 자신에 대해 사유하고 표현하려 한다. 이 같은 모순과 갈등의 이중적 의미를 표현하는 미학적 양식이 ‘아이러니’라고 할 때, 우리 시대에는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정서보다는 주체와 사물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과 불화를 암시하는 ‘아이러니’가 다소 유력한 방법이자 양식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현대 사회의 복합적 특성과 시조의 안정적이고 화해로운 양식적 특성은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이 시조의 육체를 입는 한 율격적 정형은 섬세하게 지켜져야 한다. 시조를 쓰면서 시조 고유의 선험적 율격을 해체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모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같은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다가서는 데 달려 있다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 사이의 활발한 교섭과 통합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최근 씌어진 시조 몇 편을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많은 현대시조들이 ‘감각’의 충실성과 ‘시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물의 ‘기억’에 대한 자각 등에 의해 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체의 유니크한 체험들이 대상과 평등 관계를 형성하면서, 둘 사이의 자연스런 교감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완성되고 있다. 그것은 대상과의 불화나 그 사이의 균열보다는 친화와 동화의 과정이 육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 우리 현대시조는 현대성과 시조성(時調性)을 동시에 구현하려 할 때, 이 같은 정격의 형식과 파격의 내용을 어떤 균형 감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 미학적 과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언어, 습속, 정신, 위의(威儀)를 그 안에 자연스레 내장하고 있는 ‘시조’는 그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시대의 풍속과 이념 그리고 보편적 정서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표상해온 우리 문학의 정수(精髓)이자 보고(寶庫)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시조의 정형적 한계를 적극적으로 경계하면서 ‘절제’와 ‘균형’의 미학을 벼리는 시인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각이 불모에 빠져 있는 시조 비평의 첫걸음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론과 창작만 있는 시조 시단에 평론의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들을 통해 결국 우리는 우리 시단에 만연한 서구의 미학적 박래품(舶來品)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적 항체(抗體)를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서구적 특수성에서 자라난 여타의 역사적 장르와는 다른, 우리의 언어적·세계관적 특성을 토양으로 발전되어온 시조를 더욱 애정있게 계승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 시조가 음주사종(音主詞從)의 가창적 특성이 사상되고 문자 예술로서의 지위만을 굳히게 되면서, 우리 문학에서 시조는 급격히 근대적 자유시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제 그 문학사적 공백을 우리 시대의 시적 주체들이 민감하게 반성하여 현대시조에 대한 형식적·내용적 탐색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 점에서 우리가 살핀 작품들은 시조가 사멸해가는 전통 장르가 아니라, 그 안에 내용상·형식상의 갱신 가능성을 충일하게 품고 있는 언어적 실체임을 실증하는 사례로 기억되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우리 현대시조가 지나치게 ‘동일성의 원리’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함을 알려준 실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