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시집/第3詩集·친절한 피카소·황금알, 2011

《시조세계》에 실린 이원식 시집『친절한 피카소』서평

이원식 시인 2011. 9. 5. 00:01

 

   ■이원식 시조집 친절한 피카소서평/ 시조세계2011. 가을호(pp.166-171)

 

 

 

 

 

                            무색계 사천을 수관(隨觀)하는 오경(五境)의 세계

                                                       -사공처(四空處)를 노니는 하적의 행려

 

                                                                                                                          금서휘(시인) 

 

1.

시인 김구용은 그의 일기에서 나는 책을 오독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평소에 책을 오독한 덕분이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진리를 탐구하는 자의 오랜 습관 중의 한 가지도 바로 이 오독(誤讀)에 뿌리내리고 있음이 아닐지 종종 생각해 보곤 한다. 오독은 때로 독단과 편애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예술의 감상과 이해 역시 독단과 편애의 결과물이라는 어느 논객의 견해에도 필자는 일정부분 수긍하는 바가 있다.

이원식 시인의 친절한 피카소를 접한 필자가 김구용 시인의 견해 일부를 굳이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는 소회도 자칫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이 빚은 독단이 있을지라도 이 또한 미학적 해석의 견지에서 바라본 편견의 한 관점으로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소박한 진언을 얹고 싶어서임을 밝혀둔다.

 

세상의 집은 물질계의 현상 안에서 순수한 정신적 현상계를 지향하는 행려의 물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위빠사나(vipassana) 수행의 전도는 시겁(時劫)을 향해 나아가는 생명 파계의 부단한 행보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오식(五識)으로 깨닫는 빛과 소리, 냄새, , 닿는 느낌의 오경(五境)도 이원식 시인의 수관을 거칠 때 형형한 미()를 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닐 것이다. 대상에 눈길을 주고 미미한 형상을 따라가며 응시하는 자의 시각은 뜻밖에도 예리한 단칼이 아니라 잘 무두질한 목공구의 맛을 자아내고 있다. 살을 저며 내고 실핏줄을 걷어낸 뒤 형상의 투명한 뼈마디를 건져 올린 시인의 목공구는 대패로 저민 고운 살결로 화()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대상을 다시금 공화(空華)의 세계로 옮겨 줌으로써 인식(認識)의 낡은 세계에 가둬 두기를 거절한다. 그의 시 공화空華로 들어가 본다.

 

     반쯤 헐린

     담장 아래

     누렁이

     빈 밥그릇

 

     사흘을

     울고 떠난

     낙숫물

     고여 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떠도는

     꽃잎 한 장

 

               -공화空華전문

 

 

반쯤 헐린 담장은 이미 살던 이가 떠나 버려 돌보는 이가 없는 빈집임을 짐작케 한다. 그 아래 밥 대신 낙숫물이 고여 있는 누렁이의 밥그릇이 놓여 있다. 빈집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개 밥그릇은 우두커니 정적 속에 갇힌 공화(空華)로 포착된다. 밥숟가락 놓은 기침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가고 사흘을 울다 떠나는 낙숫물이 마지막 곡례를 마름하고 있는지…… 공화는 비어있음이며 또한 가득 채워 이동하는 초간편 무한 공간이다. 눈부신 공화의 순간을 우리 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마주 할 수 있을지 잠시 어지럽다. ‘물 위에 비친 세상은 동행할 수 없다’(강물 보법步法)는 투명하게 비워낸 의식의 물그림자가 하적下跡에서 또 한 번 공화의 흔적과 만나고 있다.

 

     흰 꽃의 정령精靈들이

     밤새 몸 낮춥니다

 

     새 아침 천변川邊 눈밭

     하얀 만다라 위로

 

     총총총

     생을 가르는

     물오리의

     발자국

 

             -하적下跡전문

 

시인이 포착한 대상은 미늘 잎 한 잎마저 벗겨낸 홑것들의 적산(積散)이다. 흰 꽃이 그러하며, 그 꽃의 정령 역시 투명한 꽃술에 앉은 채관의 영이라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현현이다. 흔적이 닿지 않은 새 아침에 하얀 눈밭에서 부지런히 생과 멸을 가르고 있는 물오리의 맨발자국도 그 자체로 미늘 없는 형국이다. 그의 시적 대상들은 줄곧 꽃과, 풀과, 벌레들이며 미물들이 내생(來生)을 꿈꾸는 시간들이 존재한다. ‘비바람에 이끌려 환속還俗하는 꽃잎들이 누렁이 빈 밥그릇에 떠돌고, 하늘과 맞닿아 길을 여는 흰 비둘기로 저 먼 길에 연()을 올린다. 오고 감에 매개물들은 모두 투명한 흰 빛이며, 민낯이며, 밀기울처럼 아린 껍질들이다. 새로운 건 아무 것도 없으며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떠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존재한 바 없는 이 공화(空話)의 세계.

시인의 오식(五識)은 무탈의 길목 어디 즈음에서 잠시 쉬고 있는지, ‘다 비우고 연끊으면 새가 될 줄 알았는데다시 만나는 천 갈래 강앞에서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참으로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지통문(通門)을 더듬어 빈 하늘을 염탐하고 있다.

 

 

2.

그리하여 시인은 진열(陳列)한다. ‘마음 속 업한 그릇을 공양하며 절밥의 따뜻함을 노래하고, 노점상들이 던져주는 밥술 혹은 반찬 몇 점에 모여드는 동네 새들과 고양이들에게도 눈길을 떼지 못한다. 미세한 디테일에 온 마음을 실어 출력하는 시인의 암각화는 사물의 기호나 형상을 쪼개고 새기는 그만의 세상보기의 단면이다. 그득한 만다라의 품이 역설적인 밑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손 내밀지 않아도 잡아주고 가는 바람을 알아차리는 시인의 촉각은 가히 천상적이다. 나아가 길상의 조짐을 읽으려는 애틋한 기원을 담는 즉생인(則生人)의 성실함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산문 밖 매미 한 마리/차안此岸의 옷 벗고 있는 소리를……

 

두 번째 허물일부

 

그래서 볼 수 있는 것인가. ‘빗방울 속 늙은 지렁이/한 줄 시를 쓰고 있'는 모습을……

 

길에서 만난 시인일부

 

그래서 누흔淚痕을 떼어준 하늘/파랗다 참 파랗다'고 노래할 수 있음도……

 

극명克明일부

 

 

따뜻한 봄날 공원에서 개와 개가 마주쳐서하얀 환생(幻生)을 보는 장면은 요람으로 돌아가듯 시겁(時劫)을 되돌려 윤회를 보는 황홀함으로 읽힌다. ‘전생의 영혼들이 떠도는/세상은 애련의 꽃밭/꽃발자국 피고 지는설묘도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애련한 그림자를 탁발(卓拔)하고 있다. 시인의 세상은 모두 눈물이며 미망에 지워지는 꽃잎 진 그 자리이다. 하마 다시 암각화의 되새김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한쪽 구석

     낡은 일기도 칠판

 

     흐릿한 지도 속에

     먹감빛 곡선曲線 하나

 

     바람이 일러줍니다

     뭇 새들의

     눈물길

 

                -그림자 기호記號전문

 

하늘과 맞닿은 시인의 오경(五境) 속에 그냥 스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뒤란의 무지개에서도 지순한 하늘의 묵례를 읽어내는 그의 눈밭이 선연하다. 지난한 수행 길에 동행하는 온갖 미물들에게도 골고루 공을 돌려 나누는 시인의 공양은 친절한 피카소에 이르러 아름다운 청맹(靑盲)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암자 뒤란 눈밭 캔버스

     물음표 찍고 갑니다

 

     노스님 미소 뒤엔

     모락모락 공양 한 술

 

     산새들 날아듭니다

     입을 모아

 

     뭐꼬

     뭐꼬

 

              -친절한 피카소전문

 

표제 친절한 피카소는 역설의 미학이 한껏 묻어난다. 언뜻 나란히 두기에 모호한 친절한피카소가 어우러져 산새들이 날아와 뭐꼬 뭐꼬를 물어 역설적인 화두의 여운을 남긴다. 중생의 삶의 표의(表意)는 때로 지나치게 불가해하거나 하잘 것 없는 무중력의 모호성에 기대고 있다. 신산한 삶의 표의를 가리고 있는 눈밭 캔버스를 노스님의 미소 뒤에 남겨진 모락모락 공양 한 술의 의미로 화()하는 비상한 은유를 도치함으로써 불가해한 삶의 중력을 걷어내고 있다. 나아가 모든 생명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환유하여 미물들의 기식처(寄食處)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시인이 행려하는 하적(下跡)의 비범성이 아닐 수 없다. 탁식(託食)하는 미물조차 뭐꼬 뭐꼬로 무신불립(無信不立)하는 삶의 궁핍함에 기대기엔 눈밭 캔버스의 위빠사나(vipassana)는 경계 지을 수 없는 사티(sati)의 영역임을 시인은 일찍이 간파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갈숲 속 물오리들/모진 깃만 추스를 뿐/듣고도 아니 들은 듯/보고도 아니 본 듯’ -묵회黙會시의 일부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난해한 수사의 껍질을 벗고 몸 낮추어 하적(下跡)하는 겸허한 시업은 무색계 사천을 도량하는 행함의 실사(實辭)로 해석된다. 시인이 아껴 살피는 시적 대상들은 쉽사리 포착하기 어려운 미더운 수관에 의지한 노적(勞積)들이다. ‘견고한 조율을 거친 지천명의 응시가 아닐 수 없다.

공평한 조율은 생명 있는 미물에 그치지 않는다. ‘버려진 항아리에 담겨 채 버려지지 못한 보내지 못한 달빛과 허기를 달랜 별 몇 개에도 눈 맞추는 시인의 궁리는 이승과 전생, 내생을 오가는 탈속의 길목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닐는지 돌연 엄정해진다. 성급한 비약인가. 오늘, 전환轉換에서 그 징후는 더욱 농후해진다.

 

     마로니에 수줍은

     혜화역 2번 출구

 

 

     독백獨白을 간직한

     일곱 번째 가로수

 

     내 붉은 심장을 향해

     달려오라

 

     새떼여!

 

                  - 오늘, 전환轉換전문

 

경계를 넘어가는 페달에 탈속의 가속도를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감식일까. 오늘은 이미 내일로 전환하고 있고 온기가 가시지 않는 벤치에서 일어나 저만치 걸어가는 사내의 어깨 위로 낯익은 꽃 그림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나비는 억겁의 연을 거쳐 우리 곁에 잠시 머무는 생의 편린들이다. ‘볕뉘 속의 생전문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생의 기미도 이처럼 간단없는 한 순간의 전환을 포착하고 있다.

 

     해질녘 꽃밭 한켠

     검버섯 핀 할머니

 

     하루는 웃음 짓고

     하루는 눈물짓고

 

     꽃들은 그대로인데

     피고 지는 그림자

 

                 -볕뉘 속의 생전문

 

이완하는 삶의 흔적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무상, , 무아를 알아 오온을 본다는 수행의 막바지 단계에서 정녕 시인은 생멸의 지혜도 눈치 챈 것인지 그의 시에 드리운 그림자 기호를 따라 이슥한 사경까지 노닌다.

 

 

3.

자화상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과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시인의 모습이 겹쳐 모자이크 된 현존의 자취는 시인이 부단히 나아가는 언어의 집에 뚜렷한 형상 하나를 남기고 있으나 어느 새 시인의 족적은 이슬을 털고 달빛에 잠든 꽃밭을 벗어나고 있. 그럼에도 데칼코마니의 일휘(一揮)에 또다시 필자의 마음이 머문다.

 

     살얼음 물길 따라

     먹이를 찾는

     새끼 물오리

 

     저만치 어미 물오리

     눈시울이 붉어있다

 

     산책길,

     길 멈춘 모녀母女

     두 숨소리 젖어있다

 

                   - 데칼코마니전문

 

한겨울 살얼음이 낀 강가에서 새끼 물오리가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눈 떼지 못하고 지켜보는 어미 물오리 가족을 숨 멎도록 바라보는 모녀의 풍경. 액자 시의 전형을 보는 것 외에도 정형 시학의 성취를 제대로 느껴보는 수작으로 읽힌다. 이는 시인이 부단히 일구어 도달한 단시조의 미적 성취의 일단이 아닐까. 정형률의 절정이라 할 단시조에서 서사의 구현과 더불어 명징한 언어예술의 집을 확인하는 데칼코마니의 감동은 즐겁다.

시의 전편을 관류하는 영혼의 울림은 무색계(無色界) 사천(四天)을 노니는 영롱한 무지개를 만난 듯 벅차다. 시인의 오경은 시겁(時劫)의 사공처(四空處)에서 자유로운 운행의 질서 아래 고요하다.

여전히 삼라만상에 마음의 속살을 드러내는 시인의 쓸쓸해서 머나먼 시의 편린들에 묶여 필자의 마음도 쉬이 떠나지 못한다. ‘재활용품 수거장 길 고양이의 언 지문에서도 '보사삭 들릴 듯 말 듯 발소리' 알아채는 미세한 감식안의 파동이 시편의 곳곳에서 눈꺼풀 떨리는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머문 자리에 발 디디고 마음은 까치발을 들어 사천(四天)을 응시하는 눈매. 결코 가 닿을 수 없고 오지 않을 기별을 여삼추 기다리는 시인의 솟대는 오늘도 밤의 예각을 가로질러 의연히 서 있을 것이다. 혹여 솟대 끝 목각 새의 계명성을 듣고 있을지도……

! 그대, ‘어둠을 밟을수록 소소昭昭해지는 낙화 향기를 지금 알아보았는지를 불쑥 물어 올 것 같아 어둠의 미립자 속을 곰곰이 들여다본다. 흠향(歆香)의 은전을 받고 싶은 양이면 오경(五境)의 언저리에서 근근이 눈꺼풀을 세워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인다. 이런 필자의 범속한 속내와는 무관하게 시인은 정중하다. 마음 속 파란의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저만치 앞서 걸으며 타이르듯 부탁한다.

 

     섭리를 잊은 잎새

     미련을 놓지 않네

 

     고개 내민 봄날에

     머물 수만은 없겠지

 

     새 인연 돋아날 자리

     아름답게 비워주길

 

                    -정중한 부탁전문

 

시인의 자리는 머무름이 없다. 꽃 진 자리까지 돌아보는 애련한 영성임에도 소멸의 시간을 놓쳐버린 무례한 잎새에 자리 좀 비켜 달라 정중히 부탁한다. 한 발자국 앞서 디디며 뒤처지는 결례 두고 게서 뭣 하는가’, 온화한 일침이다. 역리를 거슬리는 요지경 속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는 시인의 일갈이 비단 잎새에 머무는 정중한 충고는 아닐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적이 민망하여 뺨자욱이 붉어진다.

한없이 아래로 흐르며 발밑에 떨어지는 미물의 눈물 자국까지도 가슴으로 적셔 앉는 시인의 내원(內苑)에는 즈믄날 상처들을 묵음黙音으로 깁는 손길이 보인다. 그리하여 몇 생을 날아온 새 한 마리 옥새를 찍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그럼에도 잠 못 든 허상虛像을 위한 볼멘 독백獨白은 아닐까스스로를 반추하고 있다. 내원의 투명한 동경에 비추인 시인의 뜨락은 그래서 공양마저 힘에 겨운 늙은 개도 쉬고 있는 관대한 사공처가 된다. 반 좌상에 턱을 괴고 한 시절을 노닐어도 괜찮을 쉴 만한 처소를 만난 셈이다. ‘가슴 속 피어나는 피안彼岸의 푸른 종소리를 들은 듯도 한……

 

 

《시조세계》 2011.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