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시집/第4詩集·비둘기 모네·황금알, 2013

■《문학청춘》에 실린 이원식 시집『비둘기 모네』서평

이원식 시인 2013. 9. 9. 00:02

 

■이원식 시집『비둘기 모네』서평/ 《문학청춘》2013. 가을호(pp.268-272)

 

 

 

 

활강화력향기유채색의 시

- 이원식 시집 비둘기 모네

 

 

                                                                                                          호병탁(시인, 문학평론가)

 

 

회색 비둘기가 구현하는 모네의 밝은 유채색

 

2년 전 이맘 때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친절한 피카소의 서평을 따뜻이 품어 이룬 불성이란 제목으로 쓴 기억이 있다. 이는 불가(佛家)적 사유를 배경으로 미천한 것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피카소는 이 시에서 산새들에게 공양을 베푸는 친절한노스님으로 등장했다.

이원식은 그동안 말없이 땀을 흘리며 부지런하게 글을 쓴 것 같다. 불과 2년 만에 네 번째 시집 비둘기 모네를 상재한 것이다. 이번에는 피카소 대신 모네다. 이전 작품의 피카소는 이름 앞에 친절한이란 형용어로 수식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시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둘기와 모네는 동격이 되고 있다. 시인은 왜 고집스러울 정도로 서양의 화가이름을 시제로 견인하고 있는가. 또한 비둘기와 모네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건널목을 오가며/ 무지개를 쪼는 아침// 잘린 발 절둑이며/ 이어가는/ 생의 퍼

                즐// 당신께 선사합니다/ 눈물 사룬/ 외발 꽃무늬

                                                                                                                                                   - 비둘기 모네전문

 

 

시조의 기본적 원리를 엄격하게 고수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정형의 기본 틀인 단수만을 깎아냄으로써 그의 철저함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시에 모네라는 말은 하나도 없다. 모네가 그린 그림 제목들 즉, ‘해돋이 인상’, ‘수련’, ‘정원등과 같은 말이 있음직도 한데 그런 말도 시에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네는 시제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모네는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한 화가다. 1874년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개최했을 때 출품된 작품들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한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했다. 특히 그의 <해돋이 인상>은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자연의 밝은 색조에 집착한 화가다.

건널목을 오가는 비둘기는 삭막한 회색도시에 버려진 존재다. 더구나 이 비둘기는 한 쪽 발까지 잘려 절뚝거리는 처량한 신세다. 이 근천맞은 것의 생은 풀기 힘든 퍼즐처럼 암담하기만 하다. 암울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비둘기는 색조로 치자면 밝은 곳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채(無彩)의 회색일 뿐이다.

여기서 도시 비둘기의 생을 표상하는 암울한 무채색과 모네의 신선하고 밝은 유채색이 극명한 대비효과로 발생한다. 모네가 등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채도 높은 무지개꽃무늬라는 시어가 행간에 동원되었음을 주목하게 된다. 이들은 모네의 그것처럼 가장 밝고 맑은 색조들에 다름이 아니다. 시인은 바로 밝은’“무지개를 쪼는”‘어둔비둘기의 모습에서 불성을 보고 있다. 더구나 그 비둘기는 잘린 발 절뚝이며생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참담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비둘기는 찬란한 무지개를 지향하며 눈물을 사룬 후에야 얻어지는 외발 꽃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인은 바로 그 꽃무늬를 우리에게 선사하고자 한다. 시인은 신산한 삶을 영위하는 우리를 비둘기와 대비시켜 위무한다. 또한 외적 형상에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정신세계를 보라고, 비둘기와 부처는 일여(一如)에 다름없다고 넌지시 어깨를 토닥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천한 것들에게 보내는 시인의 따뜻한 눈길을 좋아한다. 비둘기는 이 시집에서 주요 객관적 상관물로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를 대하는 눈길을 두어 개 보자.

 

 

                                 구걸한/ 김밥 몇 조각/ 떼어주고/ 가는 걸인

                                                                                                                                                - 조촐한 협객부분

 

                                 뻥아저씨 벌떡 일어나/ 훠어이 튀밥 한 주먹

                                                                                                                                                - 파안부분

 

 

주린 눈빛으로 모이 쪼는 비둘기에게 선뜻 김밥을 몇 조각 떼어주는 협객은 놀랍게도 걸인이다. 그 김밥이라는 것도 실상은 구걸한 것이다.

사거리 건널목에서 기웃기웃거리는 비둘기에게 튀밥 한 주먹 뿌려주는 사람은 놀랍게도 뻥튀기아저씨다. 길에서 쌀이나 옥수수 따위를 튀기며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주린 비둘기에게 공양을 베푸는 걸인과 뻥튀기아저씨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 소위 잘난 사람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이들처럼 회색의 도시를 밝게 할 수는 없다. 모네는 곤궁한 처지와 생활고, 그리고 화가에게는 천형이나 다름없는 시력 장애로 시달렸다. 그러나 그처럼 세상을 밝고 맑게 색칠한 사람은 없다.

하찮은 사람들이 하찮은 것들을 챙기고 있다. 대웅전 안의 금색 부처님도 이 배고픈 비둘기를 어쩔 수 없다. 이 연약한 미물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걸인이나 뻥튀기아저씨 같은 사람이야말로 진짜 살아 움직이는 부처다. 이들로 인해 세상은 갑자기 살 맛 나는 곳으로 변한다.

불교문예로 등단한 이원식의 시편들은 언제나 불교적 자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노옥(老屋)을 벗으려는가/ 돌아보는 길고양이// 이승에 남긴 상처/ 수월관음(水月觀音)

               의 꽃 그림자// 불현 듯 마주친 두 눈// 당신은/ 누구십니까

 

                                                                                                                                            - 하면목(何面目)전문

 

 

이원식의 시조는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다. 깊은 사유 속에 걷어 올린 성찰의 언어는 엄격한 정형의 시조 틀 안에서 쉽게 이해의 문을 열지 않는다. 어려운 불교 용어가 자주 견인되고 있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에 떠돌던 고양이가 오래된 집(老屋)’을 이제 벗으려 한다. 쉽게 말하자면 늙어 죽게 되었다는 소리다. 살아오며 그가 견딘 신산했던 삶의 상처들은 이제 돌아보면 물에 비친 달처럼 어른거릴 뿐이다. 수월관음이 구체적으로 무슨 보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면에 뜬 달처럼 아름답고 고요한 이미지다. 이승에서의 오욕칠정은 추하고 시끄러웠으나 다 부질없던 일이었고 이제는 수월관음의 무구한 이미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그림자였다. 이제 고양이는 거꾸로 인간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화자는 하면목(何面目)’이 된다. 고양이를 바라볼 낯짝도 없다.

화자는 죽어가는 고양이의 부러진 발톱 자리에/ 피어나는 오온의 꽃”(일귀(一歸)을 본다. 오온(五蘊)은 사람을 형성하는 5가지 요소라고 하니 이 대목은 개가 죽어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고 돌아가는 것이다. 일귀의 수행 중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위의 짧은 고양이 얘기 중 이미 수월관음, 하면목, 오온, 일귀와 같이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불교와 관련된 용어를 발견한다. 불교 언어 외에도 어려운 어휘는 수두룩하다. 시조에 있어서 정형의 제약은 아무래도 음절을 풀 수 없게 만든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위연(威然), 백아(伯牙), 절현(絶絃), 지관(止觀), 현애(懸崖), 절곡(折曲), 내아(內我), 사경(寫經), 세념(世念), 현과(現果), 파착(把捉), 긴간(緊簡) 등 독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한자어가 산견되고 있다. 산새에게 공양을 베푸는 친절한노스님 친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인마다 시는 자신만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시인의 수만큼 시에 대한 다른 개념이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열정의 분출이 되었든 존재의 근원적 탐색이 되었든 어떤 시인도 시를 자기성찰의 도구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원식은 늘 사유하고 성찰한다. 그리고 그의 시에는 수행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자조 체념 달관의 조용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시인의 시 쓰기는 끊임없는 수행의 한 과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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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병탁/ 1949년 부여 출생. 한국외대 중국어과, 원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시집 칠산주막평론집 나비의 궤적

 

 

 

 

                                                    《문학청춘》2013.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