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시집/第1詩集·누렁이 마음·모아드림, 2007

시집 『누렁이 마음』해설/유성호(문학평론가 · 한국교원대 교수)

이원식 시인 2007. 11. 4. 21:24

[시집 『누렁이 마음』해설]

 

                          정형으로 빚어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서정

                                                                   -이원식론


유성호(문학평론가 · 한국교원대 교수)



  1.


  이원식 시인은 2004년 《불교문예》에 시가, 2005년 《월간문학》에 시조가 각각 당선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이번에 펴내는 첫 시집 『누렁이 마음』(모아드림, 2007)에는, 그가 오랜 시간 적공(積功)을 들였을 가편(佳篇)들이 한집안의 식구들처럼 나란히 모여 있다. 특기할 것은, 이번 시집이 시조(時調) 가운데 주로 단수를 모아놓은 정형시집이라는 점이다. 시집 말미에 네 편의 연시조를 부가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단수 시집으로서의 속성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원식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정형의 가장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수들로 구성함으로써, 오랜 시간의 습작 기간과 함께 시를 향한 자신의 엄격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원래 자유시와 정형시 사이에는 엄연한 형식상, 내용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재율과 정형률 사이의 형식적 차이는 선험적 규율로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개인의 서정에 기반을 둔 자유시와 공동체적 정조의 반영에 힘을 기울였던 정형시 사이의 내용적 차이는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함의를 띠는 것이다. 따라서 시조에 가해지는 현대성 반영의 요구에는 일정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시조’라는 양식 안에 현대성의 첨단인 해체 혹은 반(反)미학의 속성까지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정형시는 자유시와는 전혀 다른 심층적 전언(傳言)으로 현대성에 응답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원식 시편 안에도 시조 양식이 견지할 수 있는 그러한 조화로운 형식과 심층적 전언이 단단하게 담겨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시편 곳곳에 깃들여 있는 불가적(佛家的)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편들이 이른바 ‘선시(禪詩)’의 형식을 빌리고 있거나, 불교적 명제를 시적으로 단순하게 번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선에서 생의 깊은 이치를 궁구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서정을 단아한 정형 속에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가 ‘현대시조’라는 양식을 통해 표출하고자 하는 ‘시적인 것’의 핵심이다.

  또한 그의 시편 안에는 자연 사물 속에서 생의 이법(理法)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묻어나온다. 그리고 자연 사물 속에 담겨 있는 신성한 가치에 눈을 뜨는 과정이 일관되게 표출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종요로운 인연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펼쳐보이기도 한다. 이 길지 않은 글은,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출렁이고 있는 이원식 시조 미학의 경개(景槪)를 가로지르고자 하는 것이다.



  2.


  이원식 시편의 기저(基底)에는, 인식의 차원이든 표현의 차원이든, 불교적 상상력에서 발원하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깔려 있다. 먼저 그것은 어떤 사물을 통해 그 이면에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엿보는 방법을 취한다. 가령 그의 시편 안에서 사물들은 각솔기성(各率其性)에 따라 존재하지만, 시인은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이치를 발견하는 ‘이물관물(以物觀物)’의 방법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저마다 사물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이면에 새로운 본성들을 감추고 있다는 점을 시인은 투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 그의 시가 지향하는 세계의 깊이를 암시해준다.


조계사 대웅전 앞

합장하는 흰 소나무


누대(累代)를 입적(入寂) 않고

흰 뼈마디 묵언고행


미완(未完)의 그대를 위한

불구승의 알몸 보시

― 「하얗게 서서」 전문


  조계사 대웅전 앞에 하얗게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두고, 시인은 “흰 뼈마디 묵언고행”으로 누대(累代)의 시간을 각인하고 있는 수도자로 은유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수도 과정은 “불구승의 알몸 보시”로 전이된다 여기서 ‘불구승’은 ‘不具僧/不求勝/不求丞’ 등 다양한 함의로 읽힌다. 불구의 몸을 한 승이거나, 굳이 이기려 하지 않는다거나, 벼슬을 구하지 않는다거나 등등의 속뜻을 복합적으로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구승’이라는 한글 기표는 다층적 한자어를 수반하면서, 이 시편으로 하여금 복합적 울림을 가지게끔 한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하얗게 서서’ 알몸으로 묵언고행(默言苦行)하고 있는 소나무의 ‘보시(布施)’는 “미완(未完)의 그대”를 향한다. 여기서 2인칭으로 설정된 ‘그대’ 역시 다양한 함의를 거느리면서 뭇 타자로 확산되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보시의 원심력은 “하나 둘/쌓은 담벼락/하나 둘/허는 담벼락”(「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에서처럼, 사물과 사물 혹은 관념과 관념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힘으로 전이되어간다. 여기서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는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다는 뜻으로서, 사람의 언행(言行)이 두루 중용(中庸)을 취하여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상태를 이름하는 말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들은 그러한 ‘무가무불가’의 세계로 가득한 ‘상징의 숲’인 셈이다.


유리창에 갇히어

박제가 된 무당벌레


화려한 계절은

아쉬움만 남기고


창 열자 꽃잎이 되어

날아가는

칠보단장(七寶丹粧)

― 「풍장(風葬)」 전문


  화려한 무늬를 한 ‘무당벌레’가 차폐된 창 안쪽에 갇혀 그대로 말라 굳어버렸다. 그 “박제가 된” 시신을 부드럽고 가볍게 풀어놓는 것은 다름 아닌 ‘바람’의 힘이다. 무당벌레는 그 바람의 힘에 의해 창을 열자마자 “꽃잎이 되어/날아가는/칠보단장(七寶丹粧)”으로 몸을 바꾼다. 그 과정이 바람 속에서 치르는 ‘풍장(風葬)’의 한 과정이 된 것이다. 이때 무당벌레의 몸뚱어리가 산산이 날아가는 풍경은, 마치 벌레가 새롭게 날아가는 것 같은 환(幻)의 상상력이 작동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지상의 분별지(分別智)가 구별해놓은 경계들을 해체하려는 시인의 상상력이 개재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모는, ‘가릉빈가(迦陵頻伽)’라는 상상의 새가 노래하는 소리에 대한 환(幻)을 통해 죽음을 가볍게 들어올리고 있는 「귀천(歸天)을 위하여」에서도 이어진다. 가령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면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비극성을 동시에 표상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원식 시편에는 “반쯤 비운/찻잔 속에/여울지다/눕는/내아(內我)”(「비구니와 커피」)가 풍요롭게 담겨 있고, “길섶에 옷 벗어두고/웃고 있는/저/진여(眞如)”(「무생가(無生歌)」)의 모습들이 뭇 사물 속에 깃들여 있다. 이처럼 이원식 단수 미학에는, 불가에서 이르는 인식과 표현을 통한 생의 투시 과정이 깊이 담겨 있다 할 것이다.



  3.


  그런가 하면 이원식 시편의 깊이는, 이를테면 사소한 풍경 속에서 생의 이법을 유추해내는 상상력에서도 적극 발원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딱히 불가적 어휘나 사유 방법을 표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상상력을 아름답게 펼친다. 그래서 그는 “풀잎의 손짓들이/한 줄 시(詩)였다는 걸”(「버려진 자개장」)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시’를 통해 그 사물들의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세계를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유모차 속 아가가

할미보고 웃는다


휠체어에 앉은 할미

아가보고 웃는다


삶이란 구르는 바퀴

요람에서

무덤까지

― 「바퀴를 위하여」 전문


  ‘유모차’와 ‘휠체어’는 생성과 소멸, 요람과 무덤을 은유하는 사물들일 것이다. 그런데 ‘유모차’ 안의 아가와 ‘휠체어’ 안의 할머니가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다. 여기서 생성과 소멸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며,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요람과 무덤이 한몸으로 존재한다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사유가 담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모차’와 ‘휠체어’를 동시에 지탱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퀴’다. 여기서 ‘바퀴’는 그 자체로 ‘윤회(輪廻)’의 상상력을 수반하면서 “삶이란 구르는 바퀴”라는 인식을 명징하게 호출할 수 있는 개연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바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굴러가는 생을 은유하면서, 바퀴가 굴러가듯이 생사의 세계를 반복하여 그침이 없다는 ‘윤회’의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의 이법을 사소한 풍경 속에서 발견하고 있는 이원식 시인은, 다음 연시조에서 퇴계(退溪)의 고고한 정신적 지경(地境)에 대한 흠모를 사물과의 화창(和唱)을 통해 구성해낸다. 이 또한 소소한 풍경 속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생의 이치를 강조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세한의 바람조차 수묵으로 눕는다

한서암(寒栖庵) 옥계 위에 배어있는 절구(絶句)소리

방금 켠 등잔불 하나 이내 귀를 세운다


묵향에 취한 손끝

속울음을 삭이는 밤


뜨락 위 옷을 벗고

농담(濃淡) 앓는 달그림자


연적에 새겨진 꽃잎

물빛으로 떨고 있다


동천(冬天) 이미 어두운데 눈먼 새가 울고 있다

마지막 남은 한 줄 못내 겨운 이명(耳鳴)인가

세모(細毛)에 숙인 허리를 다시 고쳐 앉는다

― 「퇴계(退溪)의 편지」 전문


  모두 세 수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대학자인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퇴계는 우리의 선인 가운데 편지를 유독 많이 쓴 분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아들과 손자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내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하기도 했고, 『안도에게 보낸다』라는 서간집은 지금도 자녀 교육의 지침서로 활용될 정도로 평판이 높다. 퇴계는 말년에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栖庵)과 도산서당을 세우고 자신의 학덕을 좇아 모여든 이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이 시편의 배경이 바로 그 한서암이다.

  세한의 바람조차 수묵(水墨)으로 번져가는 한서암에서, 시인은 퇴계의 체온이 배어 있는 절구(絶句) 소리를 환각으로 듣는다. 거기에는 “묵향에 취한 손끝”과 “연적에 새겨진 꽃잎”만이 달그림자에 젖고 있다. 그 한밤에 동천(冬天)에 울고 있는 눈먼 새는, 마치 미당(未堂)의 절편 「冬天」을 환기하면서, “마지막 남은 한 줄”을 시인으로 하여금 이명(耳鳴)처럼 듣게 하고 있다. 퇴계의 편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문면에 드러나지 않으나, 우리는 퇴계라는 거인을 통해 이명처럼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서암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이 화창하면서 전해주는 고고한 정신적 지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결국 이원식 시인의 시조 미학은, 소소한 풍경 속에서 높은 정신적 지경을 발견하면서, “생(生)이란 이런 것인가/파낼수록/아득한 것”(「돌의 깊이」)이라는 경구(警句)를 채집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우리가 지금까지도 보아왔거니와, 이원식 서정의 발원지는 단연 ‘자연 사물’이다. 원래 ‘자연(自然)’은 스스로[自] 그러한[然] 존재자들로 구성된 물리적 실체이다. 시사적으로 볼 때도 ‘자연’은 원형성, 보편성, 체험적 직접성 등을 거느리면서 많은 시인들의 체험 속에 광범위하게 녹아 있는 어떤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형상화의 양상을 살필 경우, 보편적 사랑의 추구, 형이상적 관념의 대입, 자연 자체의 즉물적 묘사 등 여러 작법이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자연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근원적 가치를 노래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만큼 ‘자연’은 우리 시에서 매우 깊고도 넓은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원식 시편의 수원(水源) 역시 그러한 자연 사물의 풍부한 형상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천둥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새벽이었다


창문밖 젖는 소리

빗물인 줄 알았는데


어둠 속 숨어서 우는

작은 새의 눈물이었다

― 「몹시 아프던 날」 전문


  천둥소리에 놀라 새벽잠을 깬 시인은, 그 천둥이 몰고 왔을 빗물이 창을 적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어둠 속 숨어서 우는/작은 새의 눈물”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창을 두드린 것은 빗물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물이 몸을 바꾸는 일종의 전이(轉移)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사물 뒤의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라진 공원」에서는, 새들의 지저귐을 ‘눈물’로 전이시키는데, 벤치가 있던 자리에 깃털 하나가 젖어 있는 것을 “넋 삭여/남겨준 시어(詩語)”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근본 이치는 즉물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유추하는 시인의 전이적 상상력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잡힐 듯/손에 물드는/푸른/눈물/한 방울”(「추일(秋日) - 박용래 시인을 생각하며」)에서처럼 ‘눈물 젖은 시’를 욕망하면서, 무변(無邊)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를 끊임없이 생성하게 된다. 이미 목숨을 다한 나무에서 어떤 근원적인 말씀을 듣기도 한다.


마지막

잎새마저

미련 없이

떼어냈다


다 비우고

남은 한 짐

시리지도

않구나


가만히

눈을 감는다

들려오는

해조음

― 「겨울 고사목」 전문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군 한겨울의 ‘고사목(枯死木)’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가지마저 모두 다 비워낸다. 그 순간 가만히 눈을 감고 비로소 듣게 되는 “해조음”은, 일차적으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뜻하겠지만, 심층적으로는 부처의 말씀을 비유하는 뜻으로 쓰이게 된다. 이러한 사유의 방법은 “깊은 산/깊은 숲 속/명상에 잠긴 나무들”(「노루귀」)을 통해서 신성(神聖)에 가까운 사물의 근본 이치를 경험한다든지, 돌멩이 하나에서도 “수천 겁(劫)도/넘은 인연”(「개울가에서」)을 느끼든지 하는 너른 국량(局量)에서도 넉넉히 입증된다.

  그 깊은 인연들 가운데, 시인이 자신의 원초적 기억과 사랑을 실어 형상화하고 있는 가장 주된 대상은 ‘아버지’다. 그만큼 ‘아버지’ 형상은 매우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구성되면서, 관계의 ‘유전(遺傳/流轉)’이라는 테마를 응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게 읽힌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낙엽처럼

힘겨운

사진 한 장


세월의 때

입고계신

그 시절

내 아버지


이제와

자세히 보니

내 얼굴이

거기 있네

― 「얼굴」 전문


  오랜 시간이 흘러 낡은 사진 안에 계신 아버지는, “세월의 때/입고계신” 채로, 그 시절 그 자체로 존재하신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시간의 풍화를 안 겪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인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그 사진을 자세히 보니, 그 안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할머니의 ‘휠체어’와 아가의 ‘유모차’가 순간 교차하듯이, 생은 이렇게 세대를 격하여 반복되고 유전된다. 그 아버지와 걸었던 달밤의 길을 “어느 밝은/보름밤/아버지와/걷던 생각//저 달도/기억하겠지/셋이 함께/걷던 밤을”(「思父曲 - 달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그의 이 같은 기억은, 「사부곡(思父曲) - 산책길」로도 이어져 이제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겨울밤에 아들과 걸어가던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그저 “철부지/그때 내 모습”인 아들의 모습만 보고 걷는다. 이때 ‘겨울밤’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 배경이겠지만, 심층적으로는 자신의 생이 결국 아이로 이어질 것을 은유하는 시간적 표현이 된다. 그 순간 그는 “갈 길은 멀기만 한데/닳아버린/생(生)의 굽”(「낡은 구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5.


  이원식의 첫 시집 『누렁이 마음』은, 이처럼 단수의 미학적 정수(精髓)를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불가적 인식과 생의 이법에 대한 성찰, 그리고 투명하고 섬세한 서정을 일구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정형’이라는 형식적 제약은, 일탈과 불화와 부조화보다는 질서와 화해와 조화 쪽을 겨누고 있다. 그 점에서 ‘시조’라는 양식이 견지하는 선험적 골격인 ‘정형’은 섬세하게 지켜져야 하는데, 이원식 시조 미학은 그러한 기율을 잘 지켜내고 있는 세계이다.

  가장 짧은 형식을 통하여 시를 쓰려는, 곧 언어를 부리면서도 언어의 명료함을 방법적으로 부정해보려는 노력은, 이원식 시인으로 하여금 압축과 긴장의 미학에 대한 집착을 견고하게 지켜오게끔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압축과 긴장의 감각은, 언어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언어가 과잉되는 것을 경계하려는 방법적 전략을 말하는 것이다. 이원식 첫 시집이 보여주는 위의(威儀) 역시 이러한 시조 미학을 정공법에 의해 구현한 성취에서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형으로 빚어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서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 시집에서는 더욱 활달하고 다양한 형상들이 읽혀지기를 깊이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