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시집/第2詩集·리트머스 고양이·작가, 2009

이원식 시집『리트머스 고양이』해설- ‘붉은/푸른’ 상처로 그린 작묘도

이원식 시인 2009. 9. 24. 03:43

■시집 『리트머스 고양이』해설


‘붉은/푸른’ 상처로 그린 작묘도(鵲猫圖)



최재목(시인, 영남대 철학과 교수)


0. 해설을 맡으며


지난 7월 어느 날, 가끔 만나는 시인 한 분이 찾아와 이원식 시인의『리트머스 고양이』라는 제목의 제 2시조집 원고를 보여주고는 여기에 해설을 좀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단시조 80편을 5부 - 제1부: 생(生)의 시울, 제2부: 리트머스 고양이, 제3부: 날마다 산방(山房), 제4부: 풍뎅이를 위한 시, 제5부: 소중한 편린(片鱗) - 로 구성한 시조집이었다.

사실 나는 시인도 잘 모를 뿐 아니라, 시 해설을 써본 경험이 적어, 대답을 하지 않고 ‘어쩌지…’ 하며 좀 머뭇거렸다. 

그런데 원고를 조금씩 읽어가노라니 시인 자신이 이미 불교에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으며, 시상(詩想) 자체가 불교적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제3부는「은밀한 수행(修行)/겨울 암자/ 어떤 순례(巡禮)/날마다 산방(山房)/폐사 연등(廢寺 蓮燈)/108배 하는 동안/꽃과 바람-설산스님의 입적/겨울, 동학사/겨울 화두(話頭)」등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모두 불교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최근 나도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터라 흥미를 갖고 시를 찬찬히 음미하게 되었다. 더욱이 시인의 시적 자아는 ‘여성적’이라 할 만큼 매우 여리고도 섬세함을 알 수 있었다. 세상과 접하면서 이래저래 참 많이도 긁혔을 삶[生]의 ‘상처’가 색채감 있게 점묘(點描)되어 표현된 곳곳에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나는 이처럼 시인의 시적 자아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주제넘게도 해설을 맡겠다고 말을 해버렸다. 시인의 상처에 바를 고약을 대신할 조언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시인의 상처에 약발이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1. 피 흘리는 자아

- ‘붉은/푸른’ 리트머스 고양이 -  


  이원식의 시조집『리트머스 고양이』는 제목을 봐서는 이해가 쉽지 않은 점이 있다. 시조집의 제목이 된 작품이 ‘리트머스 고양이’이다. 왜 하필 ‘리트머스’와 ‘고양이’를 합해서 제목을 만들었을까?  ‘리트머스’와 ‘고양이’는 뭔가? 등등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리트머스 고양이’를 읽어보니, 시의 맨 마지막에 ‘붉은/푸른’이란 말이 나온다. 이 구절을 읽고 나는 그 상징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리트머스’(litmus)란 무엇인가? 리트머스는 화학 용어이다. 즉 그것은 이끼 종류의 식물에서 짜낸 자줏빛 색소로서 알칼리를 만나면 푸른색이 되고, 산을 만나면 붉은색이 되므로, 알칼리성인지 산성인지를 검사하는 지시약으로 쓴다. 리트머스가 알칼리에서 ‘푸른 색’을 산성에서 ‘붉은 색’을 보여주듯이, 고양이를 리트머스에 비유하여, 그것(=고양이)이 어둠/상처와 빛, 고독/아픔과 열락 등을 만나면서 ‘붉은/푸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의미하고자 했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인적 없는 곳에서는

바람도 꽃이었다


꽃이 되고픈 길고양이

바람의 잎을 떼고 있다


상처 난 발자국 따라

수놓는 헌화(獻花)


붉은,

푸른


          -「리트머스 고양이」전문

     

이 시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원식 시인은 한 마리의 고양이가 <어둠/상처/고독/아픔=산성>→<‘붉은’빛 반응>, <빛/열락=알칼리>→<‘푸른’색 반응> 식으로, ‘리트머스 대 고양이’를 절묘한 색채 감각의 틀 내에서 비유하여 시적 자아를 열어 보인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붉은’

헌화

상처(난 발자국)

바람

고양이

(바람의)잎

‘푸른’

 

 

 

 

 

 

 

 

리트머스

 

 

 

 

 

 

                                    

시인의 ‘자아’는 <리트머스 - 고양이>에 투영되고, 사물에 대응하며 ‘붉은/푸른’ 색감으로 알록달록한 ‘꽃무늬’처럼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면 참 눈물겹기도 하다. 자아는 ‘붉은/푸른’ 피를 흘리며 서 있는 것이다. 아파도 겉으론 아프지 않은 채 웃고 있으면서(←푸른) 속으로는 눈이 벌겋도록 울고 있는(←붉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의 삶이기도 하며, 그런 삶을 위해 올린 ‘헌화’(獻花)이다. 



2. 새와 고양이로 짜낸 세계

-  ‘작묘도(鵲猫圖)’ -


  이원식의 시조집『리트머스 고양이』에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고양이’라는 시어가 많이 나온다. 이와 더불어 ‘새’라는 말도 많이 등장한다.

실제 시인의 시조집에서는, 인간 ‘세상 밖’에서 살고 있는 ‘고양이’와 ‘새’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두 이미지는 그의 ‘상처 입은 자아’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이곳저곳에 핏자국을 만들면서 상처가 만든 꽃밭을 통해서 시 세계를 확대하고 다채롭게 해준다. 다시 말해서『리트머스 고양이』는 ‘상처 입은 자아’를 정점으로 ‘고양이’와 ‘새’를 섞어가며 세계라는 그림을 직조(織造)해낸다.

나는 이러한 이원식 시인의 세계는 ‘까치 작(鵲)’, ‘고양이 묘(猫)’, ‘그림 도(圖)’ 세 글자로 된 ‘작묘도(鵲猫圖)’라 규정하고 싶다.

아! 고양이와 새라. 요즘 들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 아닌가. 흔하디흔한 새와 고양이를 시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하나의 풍경화처럼 동적인 입체감을 만들어 내려는 아이디어 같기도 하다.

새는 들판과 허공에서, 분주히 드나들며, 자신들의 삶을 산다. 일부 애완용을 제외한 대부분의 새들의 본래 고향은 허공과 들판 사이였다.

그리고 고양이도, 새와 마찬가지로, 야생이 기본이다. 고양이는 수고양이를 낭묘(郎猫), 암고양이를 여묘(女猫), 얼룩고양이를 표화묘(豹花猫), 들고양이를 야묘(野猫)라고 하는데, 현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모든 애완용 고양이는 아프리카 · 남유럽 · 인도에 걸쳐 분포하는 리비아고양이를 사육, 순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고양이들은 주인을 잘 만나면 호강하고, 주인을 잘 못 만나면 쫓겨나거나 버려져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다. 야생→애완→야생의 순환을 겪는다. 참고로 고양이의 특징 중의 하나는, 개와 달리, 인간을 대등한 관계로 간주하며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이사를 갈 때 잘 따라가지 않고, 암고양이의 경우는 발정이 나면 거의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수고양이도 가출이 잦단다.

새와 고양이에게서 야생은 그들의 ‘자연’이다. 야생은 그들 ‘스스로 그러함’이며, 크게 보면 ‘저절로 그러함’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밖’은 새나 고양이가 보면 ‘세상 안’이다. 새, 고양이를 우리가 ‘버린-버려진’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아니, 본래로 ‘되돌아간-되돌려진’ 것이라 표현해야 맞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문(文. 문명)’의 입장에서 ‘야(野. 자연)’를 폄하하면 새-고양이에게는 엄청난 결례이다. ‘야(野)’한 것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이니 그들에게서는 ‘문(문명)’인 셈이다. 우리가 그들더러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나 권한은 없다.   

이원식의 시조집에 등장하는 참새, 까치와 같은 ‘야생’의 새들은 끊임없이 인간 쪽으로 내려서고 다가서며 항상 인간의 눈앞에서 ‘묘(妙)’하게 서성댄다. 새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상하’ 운동을 하며, 인간이 거주하는 지상[地]과 천상[天] 사이에서 상호간의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러면 또 하나, 이원식의 시조집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어떤가? 그것은 상하운동을 하는 새와 달리 인간 곁에 살면서 때론 인간을 떠나거나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면서 지상의 사방(전후좌우)으로 돌아다니는 수평운동을 한다.

동양적 구라의 달인 장자(莊子)의 사상을 담은 책『장자(莊子)』의 서두에는「북명유어(北冥有魚)」로 시작하는데 이 편이「소요유(逍遙遊)」이다. 여기서 ‘소요+유’=‘논다’라는 말은 별다른 목적 없이 그냥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자에게 딱히 고정된 관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건 이렇고, 저기서 저건 저렇고,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것을 ‘보면서’ 아는 자다. 아는 것도 종류와 수준이 있는 법이다.

창공을 훨훨 나는 수많은 조류 가운데 「소요유」편에는 참새(雀)와 대붕(大鵬)이 나온다. 아주 작은 새인 참새, 어마어마하게 큰 새인 대붕이 크고 작게 세상을 바라보지만 모두 각각의 세상이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본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벌레들이 몸으로 ‘느낀다’는 것과 달리, 멀리서 높이서 조감(鳥瞰)하는 일이다. 동네를 걸어 다니다가 보는 것과 산 위에 올라서 보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며 보는 것은 또 다르다.

보는 것이 발달한 것은 새다.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땅의 기복, 건축물, 물체 등을 표현한 지도나 그림을 조감도(鳥瞰圖)라 한다. 조감은 새 ‘조(鳥)’ 자와 ‘굽어보다 ․ 내려다보다’는 뜻의 감(瞰)으로 되어 있다. 감(瞰) 자에 눈 ‘목’ 자가 들어 있듯이 새는 ‘눈/시각’이 발달 있고, 멀리서(遠) 크게(大) 바라볼 수 있다. ‘눈’은 머리(頭)에 붙어 있다. 따라서 뇌(腦)-정신(精神)-이성(理性), 나아가서는 로고스(logos)-리(理)-천(天)/천상(天上), 남성, 양(陽), 혼(魂)/넋, 상승-하강, 곧음(직선), 공간, 투시, 추론, 비디오와 연계된다.

이에 비해 벌레(蟲)는 살, 피부, 털 등으로 예민하게 느낀다(感 ․ 觸). 따라서 ‘소리/청각’이 발달해 있고, 가까이서(近), 적고 여린 것(少)까지 감지해낸다. 따라서 털․살갗(髮膚)-육체(肉體)-감성(感性), 나아가서 에로스(eros)-기(氣)-지(地)/지상(地上), 여성, 음(陰), 백(魄)/얼, 수평, 굽음(곡선), 시간, 접촉, 직감, 오디오와 연계된다.

조감은 천상적인 것을, 충감은 지상적인 것을 잘 나타낸다. 천상이 지상으로 다가와 접촉하는 것은 바람 혹은 새를 통해서다. 바람이나 새나 모두 공중을 떠도는 것이지만 지상의 것들에 접촉하며 천상의 소식을 알린다. 새는 나무에 앉아 깃털을 떨구며, 바람은 나뭇잎과 풀잎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 반면 지상의 것이 천상으로 다가가 알리는 것은 벌레, 짐승의 울음이나 물(水)이다. 벌레와 짐슴의 울음은 음파(音波)로서 공중, 허공에 퍼진다. 물은 어떤가. 개천, 강, 바다로 흐르는 물은 햇빛을 만나 수증기로 증발되어 하늘로 가서 구름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우고 술을 따르는 것에 의해 향은 연기가 위로 날아올라 공중을 떠도는 넋(魂)을 더려오고, 술은 물의 속성처럼 아래로 내려가 땅 속에 묻혀 진토(塵土)가 된 얼(魄)을 일깨워서 데려오는 상징이다. 그리고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인 말인 풍수(風水)는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藏風)’에서 풍(風)을, 물을 얻는다는 ‘득수(得水)’에서 ‘수(水)’를 따 와서 만든 말이다.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은 땅’을 찾는 기법은 하늘이 땅과 자연스런 온전한 만남을 은유한다.

이원식의 시조집에는 새를 ‘천상-상승․하강’의 로고스적 이미지로, 고양이를 ‘지상-수평’의 에로스적 이미지로 대비적으로 활용하여 의미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3. ‘바람’

- ‘홀로’에서 ‘함께 있음’의 환기 -


시인은 듣고 본다. 새와 고양이의 소통하는 의미의 세계를. 이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 직접적/일차적/내적 원인(=인)과 간접적/이차적/외적 원인(=연)에 의한 결과(果報)로서 만사․만물이 생겨나옴(生起)]의 세계이다, 상의상존(相依相存)하는 존재의 실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상이 홀로이지 않고, 늘 누군가가 곁에서 걸어주고 있음을. 그런 발자국소리를 시인은 듣고 있다.



버려진 손거울이었다

한 하늘을 바라보는


구름보다 가벼운 새 한 마리 날아간다


허기진 꽃잎이 질 때


누군가의

발소리


      -「동그라미 속으로」전문



이렇게 해서 시인은 모든 것이 ‘둘이 아님(不二)’을 말하고자 한다. ‘구름보다 가벼운 새 한 마리’는 ‘누군가의 발소리’이니 우리 곁에 수많은 것들은 모두 도반(道伴) 아닌가? 함께 걷고, 말하고, 서로 상처내고 상처 입히는 존재 아닌가? 비유컨대, 아스팔트 위로 씽씽 자동차가 스쳐지나갈 때마다 ‘모진’ 바람이 생겨나고, 그 바람에 풀 한 포기의 온몸=‘생(生)’이 들썩인다(-「새가 된다는 것」참조). 무언가는 그 무언가와 함께 있으면서 상대를 건드리고 무언가에게 찝쩍대고 있다. 그 때문에 어느 것이든 홀로 - 한 가지만 -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원식 시인은 홀로 사는 ‘고독감’에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항상 ‘홀로’를 바라보고/지켜보는 수많은 존재들을 살갑게 밝혀낸다. 그래서 만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외경(畏敬)이다. 한 가지도 홀로 있음이 없다. ‘홀로 있음이란 생각을 삼가야 한다’는 ‘신독’(愼獨)이란 말을 떠올린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그래서 ‘잠 못 든’ ‘생(生)’을 모든 것들과 생각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홀로’가 아니라는 이원식 시인의 자각은 만물의 아주 미세한 데까지 우리들의 시선을 옮겨놓고 있다.

시인은 ‘개미’의 신묘함[妙]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먼지 하나, 풀 한포기 등등 모든 것은 신묘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개미가 갑자기 우주로 다가온다. 개미가 몸으로 쓴  ‘불교의 진언(眞言)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신성한 음절’인 ‘옴()’자를 직시해낸다. 미물에게서 우주적 생명의 ‘외경’을 느끼는 순간이다.



뿌려준 음식공양

모여드는 개미들


감사의 화답인가

몸으로 쓴

말씀 ‘옴()’


손 모은

바람이 분다

바스러지는

내 허상


      -「외경(畏敬)」전문



그런데, 이런 모든 미물․미진(微塵)들이 우주적 차원의 생명이라는 진실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뜬 자(覺者)이다. ‘외경’은 애당초 그런 눈에야 비칠 수 있었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눈 감은 자가 바로 무명(無明) 아닌가. 눈 뜬 자에겐 모든 것이 찬란하면서도 슬프고, 위대하면서도 측은할 것이다.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은 기쁘고도 아프고, 즐거우면서도 우울하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현실이다. 이런 것을 내포한 채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상응하며 화답하며 지속한다. 서로 의지하고 의존된 것이 현실이니 여기에 몸을 맡기는 것이 깨달은 것이고, 여기에 위배하는 것이 무명이다. 그래서 시인은 ‘운수납자(雲水衲子)’를 자처한다.



달빛 따라 걷는 길

홀로인 줄 알았는데


적소(謫所)의 멈춘 시간

이어가는 운수납자(雲水衲子)


잠 못 든 

생(生)의 그림자

물어가고 있었다


        -「개미의 묘(妙)」전문



정처 없이 바람처럼 물처럼, 구름처럼 길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외경을 실천하는 일 아닌가. 인연법에 충실한 삶의 자세이다.

새가 끊임없이 꽃잎을 물고 둥지 속으로 들어오고, 둥지는 꽃을 품고, 다시 다른 새가 꽃잎을 물고 ‘둥지’ 속으로 들어오듯, 이 세계는 인(因)과 연(緣)에 의해 무한히 연결되어 무언가를 만들어간다. ‘새/꽃-둥지-새/꽃-…’ 식으로 ‘생’은 지속이고 반복이다. 둥지는 이 세계 내의 존재를 상징하며, 지속과 반복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꽃잎 하나

입에 물고

둥지 속에

날아든다


꽃잎을

품은 둥지

바람소릴

듣고 있다


또 다른

꽃잎을 물고

생(生)을 터는

새 한 마리


       -「새와 둥지 -우편집배원을 생각하며」 전문



  이 둥지 ‘안’에서 새는 상하 운동으로, 고양이는 전후좌우 활동으로 소통을 매개한다. 이렇게 만물들의 의존됨-연결됨-하나 됨의 인연법은 둥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인은 이곳저곳에서 홀로가 아님을 말한다. 예컨대 찬 바람에 들판과 거리를 ‘간절한’ 울음소리 내며 떠도는 고양이들을 반겨주는 ‘고목나무’가 있고, 차가운 대지 위로 내민 ‘선물’ 같은 ‘꽃’이 있다. 그야말로 이러한 불이를 깨달을 때 삶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것이 아닐까. 


찬 바람 속 고양이들

고목(枯木)만이 반겨주었다


밤이면 옹기종기

간절한 울음소리


따뜻한 봄날의 선물

우듬지에

내민


       -「기적(奇蹟)」전문



시인은 늘 우리가 타자와 함께 해 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홀로 걷는 것’을 ‘아리오소’의 독창곡처럼 착각할까 싶어 시인은 ‘달그림자’가 ‘누군가’를 대신하여 지키고 서 있거나, 내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 ‘누군가의/발소리’(-「동그라미 속으로」)를 상정한다.



홀로 걷는 산책길

결 고운 바람이 분다


멈춰 서서 눈 감으면

한 줄기 아리오소(arioso)


누군가 온 것만 같아

돌아보면

달그림자


        -「달 -오래된 연서(戀書)」전문



이 시에서 ‘홀로’-‘바람’-‘누군가’라는 식의 논리전개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홀로’(나-자아)를 ‘누군가’(남-타자)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 사이에 ‘바람’이 위치한다. 바람은 정태(靜態)의 ‘나’를 흔들어 뒤집고, 휘날리고 흩날리게 하며, ‘이것이 저것 때문에’, ‘저것이 이것 때문에’ 라는 사실을 환기시켜주는 존재이다. 시인의 시에서는 천지사방에 꽉찬, 무시로 부는 ‘바람’이 나를 타자로 연결시키는 은인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바람’은 실체도 없지만 모든 것들을 연결해준다. 마치 사랑하는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연서(戀書)’이거나, 연서를 전달하는 배달부이거나, 중매쟁이처럼, 의존됨-연결됨-하나 됨의 매개역할을 한다. 인간은 어리석음의 바람(=無明風)이 불기에 그것 때문에 명(明)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렇듯, 시인의 시에서 등장하는 ‘바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람은 무시로 불며, 이곳을 저곳으로, 저곳을 이곳으로 연결시키는 힘이 있다. 바람은 지상의 고양이에게 그 자신이 ‘꽃’임을 환기시킨다. 홀로 지내는 고양이에게 존재의 의미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그가 무언가와 함께 하는(=놀아주는) 것이다. 타줄 것이 뭐 있겠나. 바람뿐이다. 「인적 없는 곳에서는/바람도 꽃이었다//꽃이 되고픈 길고양이/바람의 잎을 떼고 있다」(-「리트머스 고양이」)에서처럼, 바람이 우리의 좌표를 잡을 수 있게 하고, 함께 있음을 돌이켜보게 한다.


4. ‘천변(天邊)’과 ‘길’

- 삶과 죽음의 소통 공간 -


어쩌면 바람은 우리 삶의 상처를 ‘힘’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아닐까. 바람 때문에 고독을 극복해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시인은 삶을 비관, 절망하지 않는다. 시인의 자아는 바람을 관조하면서 ‘상처’를 ‘은빛’으로 승화시키는, 부드러움의 강함을 얻어낸다.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인간은 길 위에서 ‘터벅터벅’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은 ‘우두커니’ 서서, ‘멍 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위치와 지나온 이력을 더듬어 볼 뿐이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고 결함임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수습해 갈 수 있다. 미완성이기에 완성을 지향한다. 자신이 ‘상처 입은’ 것이고 ‘슬픈 자유’임을 확인하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원식 시인의 시에서 등장하는 ‘천변(川邊)’은 ‘바람’에 의해 의미가 생성되는 ‘작은 풀들’(=‘삶[生])의 이야기를 잘 드러낸다. 천변은 생명들이 부대끼는 풍요의 공간이자 일상의 고향이다. ‘상처 입은’ ‘슬픈 자유’가 머무는 곳이다.



천변(川邊) 작은 풀들이

바람의 말

전하고 있다


짧은 해 저문다고

생(生)의 옷깃 여미라고


모래알 한 알까지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소중한 일상(日常)」전문



생명들은 천변에서 교합(交合)․교통(交通)한다. 교합・소통을 하지 않고선 상처 입은 것들이 구원되지 못한다. ‘생(生)의 옷깃’을 여미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래알 한 알까지도/귀 기울여 듣는’ 화해 없이는 삶은 불이(不二)가 아닌 이(二: 둘)가 된다.

시인이 천변에 집착하는 것은 땅과 물, 지상과 지하, 안과 밖이 서로 만나 소통하고 생명을 일궈가는 진면목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변에는 삶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도 있다.

천변에 이어 이원식 시인은 ‘길’에 주목한다. 길 또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길이 있어야 사람들이 교통하고, 소통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길을 가다가, 건너다가 많은 생명체들이 무참히 죽어간다. 시인은 길에서 만나는 일상의 비참함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시인에게 죽음은 비참함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길 고양이’의 죽음은 ‘헌화’(-「리트머스 고양이」)였다. 헌화는 ‘붉은/푸른’ 꽃이다. ‘신작로 포도(鋪道) 위’에서 벌어진 사고로 ‘이름 모를 꽃 한 송이’가 헌화로 바쳐진다. 헌화는 죽음이 보여준 피를 상징한 것이다. 피는 죽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꽃을 말하기도 한다.

길고양이의 죽음은 삶의 필연이고 어디서나 마주치는 흔한 광경들이지만, 시인의 시야에 그것은 장엄한 사건이다. 온갖 잡화로 장엄하게 장식된 세계가 바로 이 세계(華嚴界) 아닌가?



유폐(幽閉)의 갈 숲 속으로

청옥빛 이슬이 진다


신작로 포도(鋪道) 위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어둠 속 가뭇없는 불빛

한 잎 생(生)의

날(刃)이 붉다


      -「길고양이에게 바침-로드 킬」전문



‘청옥빛 이슬 - 꽃 한 송이 - 가뭇없는 불빛 - 생(生) - 붉다’ 처럼 ‘유일한, 단 하나밖에 없는, 순간적인, 불타는, 그러다가 꺼져버리는’ 삶은 허무한 것이다. 아니, 차라리 삶은 늘 죽음을 희생으로 해서 지탱된다고 해야 옳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고양이가 ‘로드 킬’(road kill)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해설을 덧붙인다.


     로드 킬(road kill)은 동물들이 도로를 지나가다 자동차에 치어 처참하게 죽는 것을 말한다. 로드 킬을 당 함에 있어 고라니, 삵, 부엉이 등 야생동물 뿐만 아니라 고양이나 개 등 애완동물과 희귀동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동물의 생존이나 생태계를 배려하지 않은 인간에 의한 무분별한 도로 건설에 의해 로드 킬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로드 킬에 대한 사회적 문제로서의 인식, 자연과 생명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로드 킬에 대한 공포와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과 예의가 아닌가 싶다.(「길고양이에게 바침-로드 킬」의 해설)


시인은 ‘고라니, 삵, 부엉이 등 야생동물 뿐만 아니라 고양이나 개 등 애완동물과 희귀동물’과 같은 ‘동물’ 그리고 ‘생태계’와 같은 ‘있음-존재(sein)’를 ‘도의적 책임과 예의’처럼 ‘있어야 함-당위(sollen)’로 변환하여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도로를 지나가다 자동차에 치어 처참하게 죽는 것’의 현실세계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꾸어 ‘동물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과 예의를 거론하고 있다. 이런 ‘애정 어린 시선’은 불교의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해도 좋고 유교의 ‘만물일체의 인(仁)’이라 해도 좋다.


5. ‘슬픈 자유’

-  ‘종점’ ‘종장’ ‘발문’으로서의 생(生) -


이원식 시인은 ‘삶의 자유’를 ‘슬픔’에다 버무려 놓곤 한다. 한마디로 ‘슬픈 자유’란 말이 이를 잘 드러낸다. 삶은 이미 상처를 껴안고, 물집을 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자유를 꿈꾸지만, 자유롭지 않다. 의존적이며, 비독립적인 것이 현실이다. 인연이란 말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자유롭고 싶지만 자유롭지 못한 ‘슬픈 자유’가 인연 아닌가. 



슬픈 자유

한 소절


(중략)


짧은 생(生)이

씁쓸하다

       -「커피를 마시며」부분


그렇지만 삶은 시인이 시에서 말했던 대로 ‘청옥 빛-은빛’이기도 하다. 이들 색깔은 슬픔의 색도 기쁨의 색도 아니다. ‘붉은/푸른’ 것이다.「돌아서면 배고픈 시절/눈시울 붉어지던 해(陽) (중략) 검붉은 등짝에 놓인/뜨건 국밥/한 그릇」(-「개다리소반」)처럼, 배고파 울다가도 허기진 배를 채우면 그치는 울음처럼 원래 실체가 있는 색들이 아니다. 담담히 바라보면 어디에나 있는 우리 삶의 ‘있는 그대로의 색깔’이다. 비유하자면, 쿨룩거리는 ‘천식(喘息)’의 병세처럼 몸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병’의 색깔이다. 원래 생로병사는 ‘자연’ 아니던가?



손에 쥔

흰 구름을

살며시

놓는 노파


마른 세월

들이켜고

사윈 한 숨

뱉고 있다


반의 반

접은 손수건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천식(喘息)」전문



그래서 시인은 잘 안다. 「불두화꽃/지던 날/하염없이/울었다」(-「거미와 달」)처럼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한다는 것을. 꽃이 피었다 지듯이, 아픔-상처도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아니 살아있다는 징표로서 꼭 있어야 할 일들이지 없어야 할 것이 아님을.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비둘기이지만 지상에 내려와 주린 배를 채우려고 ‘마른 낙엽을 쪼는 비둘기’처럼, 어디론가 끝없이 떠날 듯한 인간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폐지 줍는 할미’처럼 세상 만물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대로 ‘슬픈 자유’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시린 뺨에 눈물 괴는

저물녘 귀갓길에


마른 낙엽 쪼고 있는

비둘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폐지 줍는 한 할미를


           -「겨울새들」전문



그래서 시인은,「할머니, 일어나세요!/버스 종점, 종점이에요」(-「소중한 편린(片鱗))처럼, 우리는 잠들다가 결국 ‘종점’에 이르지만, 중간 중간 누군가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내려서야 할 곳에 제대로 내려서지 못함을 말한다. 내려서도 잠에 취해 제대로 걷지 못한다. 그래도 비칠거리며 걸어가야 한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모습은 하늘에서 ‘내 저질러진’ 빗줄기처럼 보인다.


창문 밖 내리는 비

아버지의 목소리


흐릿한 백지 위에

당신을 담아봅니다


종장(終章)이

쓰일 빈 자리

흰 눈물만

쌓여갑니다


        -「사부곡(思父曲) -새벽비」전문



저질러진 삶은 어둠 속에서 ‘종장(終章)’을 쓰고 있는(=내리는) ‘새벽비’와 같은 것이다.

아니, 차라리 「쓰다만/발문(跋文) 한 줄을/별빛 속/에/띄워」(-「당현천(堂峴川)을 걸으며」) 보는 것이라 표현해야 좋을 것이다.

  ‘종점’ ‘종장’ ‘발문’으로 은유된 생(生)은 불완전한 자유이기에 ‘슬픈 자유’이며, 아름다운 헌화이면서 죽음을 내포하였기에 ‘붉은/푸른’ 것이다. ‘종점’ ‘종장’ ‘발문’도 이런 논법이라면 실제로는 ‘붉은/푸른’ 작묘도의 ‘시발지’, ‘초장’, ‘서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자는 후자에서 왔고, 후자 없는 전자는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붉은 것, 후자는 푸른 것, 그래서 ‘붉은/푸른’ 것 아닌가?  



6. 은빛 날개

- ‘꿈’ . ‘환(幻)’의 희망과 절망 -


겉보기에 삶은 ‘은빛’처럼 보여 끊임없이 잡으려 다가선다. 그러나 막상 다가가 들여다보면 ‘꿈’이고 ‘환(幻)’이다. ‘마야(maya)’이다.

그러나 삶의 힘은 바로 이 ‘꿈’ .‘환(幻)’에서 생겨난다. 그것이라도 있으니 전방을 주시하며 걸어가는 것 아닌가. 그것마저 없다면 힘이 빠져서 걸어갈 수조차 없을 것이다.



찬 이슬 닿는 순간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지상의 마지막 눈물

화장을 지우고 있다


말하지 못한 아픔들

벗어놓은

꽃잎


환(幻)


           -「꽃의 임종(臨終)」전문



다시 시인은 묻는다. 「삭풍(朔風) 속/은빛 세상은/한 송이/꿈이었을까」(-「벚꽃이 지는 이유」)라고. 이원식 시인이 찾는 것은 암흑의 종말이 아니다. 은빛 ‘의미’이다. 그런 의미 있는 길을 따라 가기에 시인은 운수납자’(雲水衲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 이쯤 되면 이제 매듭을 지워야 한다.

시인에게 물어보자. 새와 고양이라는 두 은유를 ‘바람’을 매개로 해서 짜 낸 붉은/푸른「작묘도」의 결론은 어떤 것일까.

시인은 이렇게 결론짓고자 했을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아닌

은날개를 찾아서


         -「청계천, 붕어가 간다」부분



입구도 출구도 없는, 그런 해답 없는 길에서, ‘오늘도 걷는다’. 길을 찾고자 한다. 시인의 운명은 어차피 ‘무문관(無門關)’ 수행과 같다. 문도 없는 곳에 갇혀 ‘무언’이 아닌 ‘언어’로 글을 적으며 살도록 종신형에 처해진 참 곤혹스런 처지이다.

그럴수록 시인에게 희망의 열망은 더해간다. 글을 쓰면서(의지하면서: 依言) 동시에 글을 버려야(떠나야: 離言)하니 고통은 이중, 삼중 더해간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희망도 절망에 뿌리 내리고 있고, 절망도 희망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순환 논법 속에 우리가 있음을. - ‘그래서’, 더욱 거침없는 시인의 정진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