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운의 시조세계 |
시조 미학과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언어 |
홍용희
1
일찍이 최남선은 시조에 대해 ‘조선인이 가지는 정화적(精華的) 전통의 가장 오랜 실재’로서 ‘시방까지의 그 최대건립(最大建立)이오 또 언제까지든지 그 일대세력(一大勢力)은 의심할 수 없다’(《時調類聚》, 1928)고 했다. 그의 전언대로 시조는 21세기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씌어지고 읽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시조가 민족적 정화로서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시조 미학의 본질과 연관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은 시조의 내용가치와 형식미학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형식이란 내용의 반영이며 결정체로서의 속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조 미학이 추구하는 내용가치의 원형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시조는 발생초기부터 중심 창작층이 사대부였다는 점에서 보듯 성리학적 이념과 풍류의 미의식이 기본 요소를 이룬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이념의 탐구와 실천을 모색하면서 풍류의 격조를 구가하는 삶을 시조 양식을 통해 추구했던 것이다. 성리학적 이념의 시적 추구는 학문적 삶은 물론 정치, 교육, 문화의 국면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훈민, 학문, 송축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성리학적 이념의 시적 추구 방식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양상을 특징으로 한다.
주자(朱子)가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사용한 거경궁리는 학문하는 이론적 방법이면서 학문을 통하여 얻어진 가치실현의 실천적 방법을 가리킨다. 궁리라는 이론적 학습을 통해 앎을 얻고 거경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앎을 실천한다. 물론 여기에서 거경궁리가 지향하는 궁극은 인간과 우주의 존재원리와 본체에 해당하는 이(理) 혹은 도(道)의 세계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조가 보여주는 거경궁리의 성향은 인간과 우주의 존재원리와 본성을 찾고 이를 생활 속에 내면화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시조의 미의식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성이 아니라 지극한 도를 깨닫고 실천하는 법열(法悅)에 가깝다. 시조는 거경과 궁리라는 학문의 조화, 시적 자아와 학문과의 일치를 위한 학문 수양을 지향하고 이를 생활 속에 실천하는 삶을 주조로 했던 것이다.
물론, 시조 양식은 점차 조선시대 중기를 넘어서면서 엇시조, 사설시조를 거쳐 오늘날의 현대시조로 이어지는 형식적 변주와 더불어 성리학적인 학문, 훈민, 송도, 강호의 주제론이 점차 가라앉고 생활세계의 정서와 감각이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거경궁리의 미의식을 원형으로 하는 시조의 태생적인 생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앞에서 제기한 시조가 오늘날까지 창작되고 있는 주된 배경에 대한 대답으로 거경궁리의 미의식을 제시하고자 한 셈이다. 이것은 시조의 정제된 형식적 절조는 삶의 존재론적인 본성과 근원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실천의지의 응결체로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시의 위세가 시단의 전반을 압도하고 있으나 한 켠에서 시조가 지속적으로 씌어지고 발표되는 것은 인간과 우주의 근원적 존재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문제가 한시적인 역사성을 넘어서는 영원성을 지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논의에는 현대시조의 경우 매우 다양한 양상의 변주를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현대시와 변별되는 시조의 정체성으로 절도 있는 정제미의 형식론적 특성과 더불어 거경궁리의 미적 추구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것이 바림직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현대시의 압도적 위세 속에서도 시조가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론적 거점이며 가치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2
백이운의 시조 세계는 이와 같은 시조의 존재론적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게 한다. 그의 시조 세계는 주로 일상적 삶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거경궁리의 언어의식을 통한 자신과 세계의 존재론적인 근원과 본질에 대한 인식이 표나게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그의 시조는 일상 속에서 환기하는 신성, 이성적 영역 속에서 소통하는 영성의 요소가 빈번하게 드러난다.
먼저, ‘신(神)의 길’과 ‘궁리’의 언어세계가 노래되고 있는 다음 시편을 살펴보기로 하자.
내 안에 길이 있어 신(神)이 지나다녔네
그 길은 행복했네 갈 데 없이 행복했네
길 또한 신이 되는 길을 골똘히 궁리했네.
내 안에 길이 있어 궁리(窮理)가 지나다녔네
그 길은 행복했네 올 데 없이 행복했네
그 길도 천제가 되는 길을 궁리하고 궁리했네.
신이 되는 길을 궁리하던 궁리와
천제가 되는 길을 궁리하던 궁리가
의좋게 합세하는 길을 궁리하고 궁리했네.
―<옛날옛적에 궁리(窮理)가 있었네> 일부
‘내 안에 길이 있어 신이 지나다녔’다는 인식은 신기통(神氣通)의 원리를 환기시킨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가 설명하는 신기통의 이치에 귀 기울여 보면, ‘하늘이 낸 사람의 형체(形體)는 모든 수용(須用)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이 신기를 통하는 기계(器械 : 신체의 기관)이다.
눈은 색을 알려주는 거울이고, 귀는 소리를 듣는 대롱이고, 코는 냄새를 맡는 통(筒)이고, 입은 내뱉고 거둬들이는 문(門)이고, 손은 잡는 도구이고, 발은 움직이는 바퀴이니, 통틀어 한 몸에 실려 있는 것이요, 신기(神氣)는 이것들의 주재(主宰)이다.’ 이와 같은 신기의 주재가 있음으로 인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며 손으로 잡고 발로 다니는 것과 목마르면 마시고 주리면 먹는’ 과정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오차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기는 궁리를 통해 터득되고 발현될 수 있다.
궁리는 ‘내 안에’ 있는 ‘신(神)’을 깨우고 발현시키는 작용을 한다. 물론, 여기에서 ‘신(神)’이란 자신의 삶을 관장하는 우주 생명의 본성을 가리킨다. 인간은 안으로 닫힌 개체 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적으로 열린 영성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궁리’를 통해 ‘내 안’의 ‘길’로 지나다니는 ‘신(神)’을 발견함으로써 ‘길’ 또한 스스로 ‘신이 되는 길’을 궁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의 이법과 도(道)의 원리에 따른 근원적 삶에 대한 추구와 갈망으로 해석된다.
백이운의 시 세계에서 신기통에 입각한 ‘궁리’의 면모는 구체적인 일상사 속에서도 발견된다.
① 매화가지 몸을 굽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
정적의 한순간 한 꽃잎 떨어져
찻잔에 파문도 없이 신(神)의 길이 열린다.
―<속삭임> 전문
② 너의 향기 끝내는 난초꽃으로 오는구나
정릉 숲 골짜기에 조그맣게 숨어서
심령의 밑바닥까지 퍼올리고 있구나
―<백로(白露)에> 전문
③ 황금빛 가사장삼 화려하게 둘렀다가도
때 되자 미련 없이 떨치고 가는 나뭇잎
가서는 제 뿌리 곁에 나부죽이 엎드렸네.
―<본색(本色)> 전문
시 ①에서 시적 화자는 매화차 잔을 앞에 놓고 있다. ‘몸을 굽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하던 ‘매화가지’가 낙화의 광경을 통해 내밀한 말을 전하고 있다. 매화 ‘꽃잎’이 ‘파문’도 없이 ‘신(神)의 길’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영성한 ‘신(神)’은 이처럼 일상생활 주변에서도 늘 함께 한다. 다시 말해, 우주생명의 이법은 일상사를 주재하는 운행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시 ②는 ‘향기’로 다가오는 ‘너’를 묘사하고 있다. ‘정릉 숲 골짜기에 조그맣게 숨’은 ‘난초꽃’의 향기에도 절대적인 신의 모습이 반사되고 있는 것이다. ‘난초꽃’의 개화는 우주적 협동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삼라만상은 독자적 개체이면서 동시에 우주적 자아인 것이다.
이때, 신의 존재성이란 인간은 물론 모든 삼라만상에 내재하는 우주적 영성을 가리킨다. 시 ③은 ‘나뭇잎’을 통해 자연의 이법의 ‘본색(本色)’을 그리고 있다. ‘황금빛 가사장삼’을 ‘미련없이 떨’친 나뭇잎의 생애에서 우주생명의 운행원리를 읽어내고 있다.
이처럼 근거리에서 포착된 신의 존재성을 원거리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풍경을 펼쳐 보인다.
초여름 늦은 비가 점호하여 지나간 뒤
뒤뜰 개구리 떼 일제히 발 구르고
하늘은 귀를 막고서 초승달만 내보냈다.
―<견디다 못해> 전문
신의 존재성이 ‘하늘’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귀를 막고’ 있는 ‘하늘’은 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은 매우 분주하게 움직인다. ‘초여름 늦은 비’를 내려 ‘개구리 떼 일제히 발 구르’도록 하고, ‘초승달’이 창공으로 떠오르도록 한다. 하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듯 태연하게 머물러 있으면서도 정작 하지 않는 일이 없다. ‘개구리’의 울음소리에도 ‘하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흥미롭게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의 현신 혹은 ‘하늘’의 운행원리를 인간사에 대응시키면 ‘따뜻하고 슬픈 운명’의 표정으로 나타난다.
무욕(無慾)의 계절을 완성하기 위하여
여인은 고개 숙여 담배에 불을 단다
연기에 피어오르는 따뜻하고 슬픈 운명
아득한 마음의 발 지친 벌판을 달려
인고(忍苦)랄 것도 없는 무진(無盡) 꽃을 피우고
시간은 상채기 하나 없이 마구 잎을 날린다.
―<소품> 전문
인간 삶이 하늘의 운행원리에 순응하는 것은 스스로 ‘무욕(無慾)의 계절을’ 사는 것이다. 물론 ‘무욕(無慾)의 계절’은 인간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내는 세계의 본모습이다. ‘시간은 상채기 하나 없이’ ‘무진(無盡) 꽃을 피우고’ ‘마구 잎을 날린다.’ ‘황금빛 가사장삼’도 모두 ‘때 되자 미련 없이 떨’(<본색(本色)>)쳐 내야하는 나무의 존재와 상응한다.
다시 말해, 무욕의 삶을 사는 것이 ‘시간’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이며 ‘하늘’의 이법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인간 삶의 ‘따뜻하고 슬픈 운명’의 실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삶에서 ‘무욕의 계절’ 혹은 하늘의 이법이 가장 잘 구현된 경우는 언제일까? 그것은 천진무구한 어린 시절이다. 어린아이는 인간의 근원적 모습이며 가장 자연에 가까운 형상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누구나 ‘부처’이다.
소금정(小金井) 작은 하늘이 지상으로 길을 놓아
굴렁쇠를 굴리며 내달려온 이가 있다
둥그런 세상을 여신 또 한 분 아기 부처.
동그랗게 입을 모아 ‘우’하고 불러보고
환하게 웃음 지으며 ‘희’라고 불러주면
저쪽 별 이름은 잊고 까만 눈만 깜빡인다.
아기 부처가 활짝 펴든 세상은 환한 연꽃
연꽃 사랑 연꽃 웃음 한 입 가득 물고서
오늘은 우희(優希)란 한 송이로 하늘다이 우뚝하다
―<우희(優希)란 이름의 부처> 전문
‘하늘이 지상으로’ 놓은 ‘길을’ 따라 ‘한 분 아기 부처’가 ‘굴렁쇠를 굴리며 내달려’ 오고 있다. 하늘 ‘저 쪽 별’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것이다. ‘아기 부처’에게 ‘하늘과 땅 사이는 진진한 삶의 놀이터’(<생(生), 기쁨 뒤에 오는>)이다. 천상과 지상, 신성과 세속이 연속성을 지닌다. 그가 ‘펴든 세상’이 ‘환한 연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연꽃 사랑 연꽃 웃음 한 입 가득 물고’있는 어린아이에게 지상은 천상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천상의 원리가 지상에서 향유되면 지상이 곧 천상인 것이다.
한편, 백이운의 시조 세계에서 지상과 천상, 이성과 영성의 혼재와 연속성은 다음과 같은 간곡한 그리움의 언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어머니가 저쪽 나라에서 신호를 보내신다
나는 이쪽 나라에서 그 신호를 받는다
손거울 마주치면서 환희(歡喜)하는 한순간!
―<번개>
필시 무슨 기쁜 일 그곳에 있는 게야,
어머니 손전등 켜들고
내 집 지붕 비추시니.
하늘은
잎새 한 장도
허투루 떨구지 않네.
―<기별>
지상과 천상,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화되고 있다. ‘번개’의 불꽃을 어머니와 나의 ‘손거울’의 조우로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와 죽은 어머니가 서로 교감교통하고 있는 찰나이다.
죽은 어머니는 화자의 반응이 없을 때에도 수시로 나타난다. ‘그곳’에서 기쁜 일 있으면 ‘손전등 켜들고/내 집 지붕 비추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다녀간 자리에 ‘잎새’를 흔적으로 남긴다.
시적 화자는 ‘잎새 한 장’에서 어머니의 자취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영역과 영성적 영역이 동시에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세속과 신성, 이성과 영성의 영역이 연속성을 이루는 백이운의 시적 삶의 지평은 자연스럽게 웅혼한 풍류의 미감을 거느리게 된다.
① 천하 명가에 비전된
보도(寶刀) 한 자루 있었네
바람을 가르면
붉은 꽃잎 날렸네
안개비 흩뿌린 날엔
태허(太虛)보다 아득했네
―<적(寂)> 전문
②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졸다 말다 바윗돌들
물소리 풀어놓고 소리개를 날린다
눈인사 하는 둥 마는 둥 제 갈 길로 가는 바람
―<백담(百潭)에서> 전문
③ 초여름 땡볕을 머리에 담뿍 이고
조막만한 모과가 툭, 툭 떨어진다
지구의 중심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거다
익기를 기다리지 않고 고스란히 바치는
모과 같은 사랑 있어 가을은 또 오는 거다
저토록 사무치게 기리는 누군가가 아름답다
―<원(願)> 전문
작은 시조의 형식 속에 어느 현대시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크고 웅혼한 기개와 기운이 펼쳐져 있다. 시 ①의 ‘보도(寶刀) 한 자루’가 바람을 가르자 ‘붉은 꽃잎’ 흩날린다. 신천지가 열리는 개벽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처럼 웅혼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기에 ‘안개비’ 내리는 정적에서 우주가 열리던 아득한 태초의 ‘태허(太虛)’를 응시할 수 있다.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하던 기원의 시간의 신성성이 서늘하게 감지된다. 도가적 풍류의 현묘한 격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시 ②는 백담의 ‘바윗돌들’과 ‘바람’의 한가롭고 무정한 듯한 일상이 그려지고 있다. ‘졸다 말다’하는 ‘바윗돌들’이 ‘물소리 풀어놓고 소리개’를 날리고 있다. ‘바윗돌들’이 있어서 물소리가 여울지고 ‘소리개’가 제 흥에 겨워 날게 되는 것이다. 이점은 바람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바람이 있어서 또 다른 무엇인가가 생성되고 신명나고 흥겨워진다.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은 이처럼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드라망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이러한 사정을 바위돌이나 바람은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눈 인사 하는 둥 마는 둥 제 갈 길로’ 간다. 자연이 일러주는 여백과 여유의 멋이며 풍류의 진경이다.
시 ③은 ‘모과’의 낙과를 ‘지구의 중심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사랑으로 느끼고 있다. 모과의 몸을 던지는 간절한 사랑의 행위로 인해 지구에는 가을이 온다는 것이다. 인간사의 범주를 넘어서는 사랑의 담론을 통해 계절적 변화의 계기성을 포착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시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인간과 자연, 세속과 신성, 이성과 영성의 범주를 포괄하는 격조 높은 풍류의 울림은 백이운의 거경궁리의 언어의식이 도달한 시조미학의 절정이며 아울러 우리 시조가 견지해야할 거경궁리의 지향성에 대한 한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3
시조가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문학의 정화로써 지속적으로 창작되고 읽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응답으로 시조 미학의 본령에 해당하는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언어의식을 들고 아울러 이러한 관점에서 백이운의 시조 세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백이운의 시조 세계는 삶의 일상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존재론적 근원과 본성에 대한 거경궁리의 미적 탐색을 표나게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조는 현상과 본질, 세속과 신성, 이성과 영성이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미적 사유의 웅혼한 지평과 여기에서 울려나오는 현묘한 풍류의 미의식을 보여준다.
시조의 작은 형식이 어느 현대시보다 더욱 깊고 드넓은 사유의 경지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백이운의 이러한 시적 특장(特長)은 그의 소중한 개인적 성과물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우리 시조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거경궁리의 미적 가능성을 새삼 진지하게 환기해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덕목을 지닌다.
홍용희 |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저서로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김지하문학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유심》2009.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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