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학》2012. 3월호
■내가 읽은 나의 시조/ 「3월에 우는 귀뚜라미」《현대시학》2012. 3월호(pp.40-42)
귀뚤귀뚤
이원식
오늘도 참 많이 울었다
풀에게
미안하다
이 계절
다 가기 전에
벗어둘
내 그림자
한 모금 이슬이 차다
문득 씹히는
내생(來生)의 별
(『열린시학』 2011. 겨울호)
3월에 우는 귀뚜라미
이원식
시간이 참 빨리도 흐른다. 이 졸시를 지을 무렵이 겨울 초입이었는데, 어느새 해와 달이 바뀌고 입춘(立春)을 맞이한 지금 귀뚜라미 소리는 잠시 까맣게 잊혀진지 오래다. 골똘히 생각하니 다시금 젖은 눈물 가슴 한 가득 배어든다. 봄을 맞이하려는 3월, 공교롭게도 봄날 활짝 핀 꽃이 아닌 가을의 귀뚜라미를 떠올려본다. 그들은 아마도 ‘내생(來生)의 별’이 되어 있을게다. 이 시를 쓰기 전 몰두해서 이해하려했던 귀뚜라미를 소재로 한 일본의 하이쿠[俳句] 몇 편을 기억해본다.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이싸
돌아눕고 싶으니/ 자리 좀 비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어부의 오두막/ 바구니에 담긴 새우등 속에/ 귀뚜라미 몇 마리! -바쇼
죽은 자를 위한 염불이/ 잠시 멈추는 사이/ 귀뚜라미가 우네 -소세키
풀잎에 앉은/ 저 귀뚜라미,/ 다리가 부러졌네 -가케이
우리가 기르던 개를 묻은/ 뜰 한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시키
내가 죽으면/ 무덤을 지켜 주게,/ 귀뚜라미여 -이싸
어린 귀뚜라미야,/ 내가 없는 동안 사이좋게 지내고/ 집 잘 지켜다오 -이싸
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우니/ 내 귀가 밝아지네 -시바
- 『한 줄도 너무 길다』(류시화 엮음)에서 발췌
짧은 하이쿠 속 ‘귀뚜라미’의 모습들. 시인들은 선시(禪詩)라 해도 무방할 만큼 관조적(觀照的)이거나 직관적(直觀的) 혹은 심미적(審美的) 심상으로 노래하고 있다.
나뭇잎들 남몰래 붉은 화장을 지워버릴 즈음 눈물자국 선명해진 나무들 어깨 위로 찬 이슬이 내렸다. 그날 저녁 공교롭게도 폭우(暴雨)가 내렸다. 새벽이 왔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새벽 폭우 속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그 요란한 폭우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걸음을 멈추고 슬며시 우산을 내려놓자 순간 또 한 마리의 귀뚜라미.
쓸쓸하거나 관조적이기보다는 현실적(現實的)이고 또 절박(切迫)하고 싶었다. 감수성(sensibility)의 미학이기 보다는 동일성(identity)의 귀결이기를, 그저 한 마리 귀뚜라미이고 싶었다. 한 계절 울었으니 주변의 풀에게 너무도 미안하기 짝이 없었고, 찬 이슬이 살갗에 닿을 때는 이승의 그림자를 벗어야 할 때임을 저절로 느끼게 된 것이다.
폭우가 그친 후, 거짓말처럼 까만 하늘 속 별들이 나타났다. 반짝이는 별 하나를 입안에 넣어 본다. 그려보는 ‘원(願)’ 하나. 혹여 내생(來生)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폭우도 풀잎도 귀뚜라미도 아닌 ‘별’이 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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