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ry/발표글·산문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시조시학》2010.겨울호/ 이원식

이원식 시인 2010. 12. 4. 00:00

 

《시조시학》2010.겨울호

 

 

■'집중소시집' 시작노트/《시조시학》2010. 겨울호  pp.171-173

 



                                         “프롤로그 혹은 에필로그”


                                                                                                                               이 원 식

 

1.교감(交感)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중랑천(中浪川)이 흐르고 있다. 비록 손과 손을 맞잡는 거대한 아우라지 강물은 아닐지라도 목이 메어 그 사연 하염없이 쏟아내는 물오리의 호곡(號哭)을 음미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화려한 풍미와 명예보다는 시대적 질곡(桎梏)의 아픔을, 침묵의 미학을 노래했던 옛 시인들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2.집 없는 누렁이와 길고양이 그리고 비둘기


   모든 중생들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이 생의 모습은 잠시 빌린 껍데기라 했던가. 외진 골목길에서, 화려한 꽃밭에서, 버려진 가구 틈새에서 불현 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축생(畜生)들. 어느 전생 혹은 내생의 또 다른 내 모습이리라. 그 속에 모든 진리와 해답이 있음을. 때로는 고맙고, 때로는 슬프고 안타깝고, 때로는 절규인 피안(彼岸)의 부침(浮沈)들. 


3.불이(不二)


   음악을 최고의 취미로 삼는 오디오 마니아들은 진공관(vacuum tube)의 소리에 심취한다. 디지털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만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다. 단지 빈티지적 향수(鄕愁)에 젖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휴머니즘을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공관의 음색은 수명을 다해 거의 끊어질 듯 마지막 불꽃을 피울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문득 이 시대의 원로 시조시인들을 클로즈업 해 본다.


4.변화(變化)


   막스 브루흐의 작품 ‘콜 니드라이(Kol Nidrei)'를 아쟁으로 연주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본래 연주악기인 첼로와 관현악 혹은 콘트라베이스 독주가 아닌 피아노 반주에 맞춰 우리나라 악기인 아쟁으로 연주한 것을 말이다. 물론 이건 일례(一例)에 불과한 것이다. 실험이든 모색(摸索)이든 아니면 도전이든 우리 것으로 취하기위한 아름다운 문화적, 예술적인 혁명(revolution)의 단계이다.


5.구체(具體): Simple is Best!


   다시 세 번째 단수시집을 준비한다. 정형시로서 가장 변별력 있게 표의(表意)할 수 있는 것이 단수(單首) 즉 단시조(單時調)라 생각한다. 이 짧은 45자 내외의 단수 속에 서양문학이론을 대입해 보더라도 공감각(synesthesia)은 물론 긴장(tension),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자동기술법(automatism), 꼴라쥬(collage) 및 몽타쥬(montage) 등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다. 문학적 원형(archetype) 속에 보편성과 영속성이 있듯, 시조 역시 단수 속에 본질적인 실마리와 함께 그 미래의 해답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다.

   길을 가다 검객을 만났을 때만이 제 칼을 보여주고, 시인이 아닌 이에게 제 시를 보여주지 말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에는 분명 슬프도록 강렬한 아우라가 숨어있다.


6.몰아(沒我)


    어느 날 두견새 한 마리가 한참이나 내 곁을 따라다니며 울어 준 적이 있다. 몇 번이나 자리를 옮기며 외면하려했지만 결국은, 결국은 나도 울고 말았다. 그 순간 나도 두견새였음을 내생(來生)에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